Critique

  • "파랑은 무한하고 신적인 일치감이 지배하는 공허다." Max Heindel

  • "Blue is infinite emptiness controlled by divine accordance." Max Heindel

  • "태초에 무가 있었고, 그리고 아주 깊은 무가, 그리고 결국 푸른색의 무가 있다." Yves Klein, (1928~1962)

Korean

  • 조은필 설치의 상수(constancy)와 변수(variables) -- 고동연 (미술비평)

    -조은필: 현대미술에서 작가의 자기 브랜딩
    조은필 작가에게는 몇 개의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항구 도시 부산을 연상시키는 ‘블루’ 색상의 설치 작업으로 유명한 작가! 바다의 거대한 규모에 걸맞게 불투명한 광목이나 레이스 등으로 전시 공간 전체를 덮어버리는 작가! 국내에 흔치 않은 설치작가! 20년 남짓한 기간 동안 비엔날레를 포함한 거대 국내외 그룹전과 개인전을 거치면서 작가가 일구어낸 성과를 가리키는 표현들이다. 동시에 이들 수식어는 ‘지역’ 여성작가가 어떻게 유형화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물론 현대미술계에서 유형화는 작가에게는 필연적인 과정이자 결과이다. 작가들 스스로 여타 작가들과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 특정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내세우는 경우도 많다. 미술사가와 시장 연구가들은 인상파의 연작 시리즈를 대중에게 자신의 스타일을 각인시키는 자기 브랜딩의 ‘훌륭한 역사적 전례’로 설명하고는 한다. 같은 장면을 여러 각도에서 다양하게 그려온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기 클라우드 모네(Claude Monet)의 연작화는 현대 예술가의 탐구 정신을 보여주는 잘 알려진 예로 알려져 있다. 모네는 역사적인 소재가 유행하던 19세기 프랑스 화단에서 하찮아 보일 수도 있는 자연의 대상을 부단하게 한 관점에서 분석하듯이 반복적이고 체계적으로 그렸다. 연작은 의식적인 반복의 과정이었으며, 작가와 그의 화상은 이를 통하여 모네의 특정 스타일을 미술시장에 알릴 수 있었다.

    새로운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미술시장의 태동기에 예술가들은 이제 새롭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내고 이야기 전개를 만들어내야만 하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직면하였다. 19세기 특정한 정치나 종교 세력의 커미션을 받아 제작하던 시대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내적인 요구에 따라 작업을 제작하기 시작한 시대, 예술가들은 자신을 잠정적인 고객에게 알려야만 했다. 누구에게나 눈에 띄고 다른 작가와 자신을 차별화시키며 궁극적으로 작가에 대한 무형의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현대미술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기 브랜드화가 예술가의 필수 덕목처럼 여겨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유래하였다. 20년 정도의 경력을 지닌 조은필이 특정한 자신만의 스타일과 색상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은 작가 자신의 미학적인 선택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척박한 국내 현대미술계나 부산미술계에서 자기 차별화를 위한 중요한 생존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평가들이 주로 주목해온 조은필 작가 특유의 블루 색상의 설치 프로젝트를 ‘반복’과 ‘변화’라는 두 축을 사용해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탐구의 정신을 현현할 수 있는 작가의 선택과 집중, 그리고 이에 따른 ‘반복성’만큼이나 자기비판과 변화의 과정도 현대미술가가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작가 특유의 소재나 양식이 자신의 차별성을 브랜드화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에 그치지 않으려면 작가는 변해야 한다. 특유의 소재나 양식은 작가의 태도를 보여주는 수단일 때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덧붙여서, 조은필은 작가 자신이 변화를 갈망하고 있고, 작가의 커리어상 변화가 매우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비엔날레와 같은 거대 그룹전에 포함되고 국내 대기업의 주요 설치작업을 맡게 되면서 지명도를 한껏 높이고 있으며 지역의 여성 중견 설치작가로서 입지를 다져왔다. 그렇다면 조은필은 이제까지 자신을 국내 미술계에 널리 알려지게 만든 거대 설치작업으로부터 어떠한 변화를 꾀하여야 하는가?

    당장 지금 시점에서 이에 대한 답변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조은필이 최근 취하고 있는 변화된 방향성을 해체해 볼 필요가 있다. 조은필의 변화는 철저하게 개인적인가? 아니면 상황에 따른 것인가? 최근 작업은 작가의 정체성과 맞물려져서 어떠한 측면에서 작가의 변화된 역할이나 관심을 반영하는가? 변화의 계기와 양상을 분석해봄으로써 궁극적으로 작가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덮개를 부분적으로 걷다.
    조은필은 코로나를 변화의 직접적인 계기로 들고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화가 나고 답답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밖에 다니다가 어느 지점이 딱 되었을 때는 조금 이렇게 마음이 정리되면서 주위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장소를 섭외하고 활동적으로 움직였던 이전 창작 방식에 비추어 보았을 때 ‘갇혀 있는 상황’이 작가에게는 매우 답답하고 힘들게 느껴졌다고 한다. 통상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라 일을 진행하고는 하였으나 특정한 공간에 있다 보니 에너지를 푸는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이에 작가는 밤마다 인적을 피해서 동네 산책을 다니다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조은필은 주로 일상적인 사무실, 회사의 건물 로비, 미술관의 화이트박스를 전혀 다른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던 ‘설치’ 전문가였다. 일상적인 공간을 극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그것도 푸른색의 천을 비롯하여 레이스나 여타의 유동적인 재료(뜨개천. 이끼. 나무. 시트지. 새. 깃털 둥의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서 전체 공간을 뒤덮어버리던 것이 그의 흔한 작업 방식이었다. 반면에, 점차로 천 밑에 있던 일상이 새롭게 작품의 내용이 되었다. 자신이 철저하게 컨트롤하고 만들어내는 풍경에서 오히려 수동적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풍경과 세부 일상이 작품을 구성하게 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격리되어 있던 동안에 작가가 즐겨 했던 밤길 산책에서부터 영감을 얻기 시작했다.

    "나무가 흔들거리는 것이 뱅뱅 도는 어떤 드레스처럼 한순간 이상하게 보였어요. 평상시에 지나다니면서 보던 나무가 밤에는 특이하게 보였어요. 게다가 지난 폭풍에 나무들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면서 생명이 다했다는 것을 알겠지만 오히려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왔어요.... 밤에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나무가 마치 실제로 생명력에 의해 움직이는 나무처럼 달리 보였어요. 그 생경함을 표현하고자 작업하게 되었어요." (조은필, 인터뷰)

    어둠 속에 묻힌 풍경과 물건의 목소리에 주목한다는 것은 일종의 답보 상태에 있던 자신의 새로운 감각을 열어 본다는 것을 의미하고, 죽어 있던 나무와 같이 생명감이 없어 보이는 것이 갑자기 능동적인 존재로 느껴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실제로 최근 조은필의 작업은 천으로 전체 풍경을 감싸는 동시에 천 밑에 숨겨져 있던 오브제를 끄집어내듯이 하나하나 물건을 레이스로 감싸면서 세밀한 것에 더 주목하는 양상을 보인다. 조은필은 원래 오브제를 전체적으로 천이나 레이스로 감싸고 공간을 메꾸어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덧붙여서 정신적이고 초월적인 의미를 상징해온 ‘블루’ 색상은 그녀가 사용하고 있는 다양한 재료의 오브제를 균질화하고 차갑게 식혀버린다. 파란색을 흔히들 천상의 색상으로 일컫고는 하는데 색상의 파장이 보는 이를 심리적으로 안정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서구 종교화에서 역사적으로 하늘이나 천상을 나타내는 색상으로 주로 사용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일 것이다. 동시에 블루 색상은 한순간에 대상을 화석화시키고 가라앉히는 효과를 자아낸다고도 볼 수 있다.

    반면에 청주시립미술관에 전시된 작업에서부터 시작된 레이스로 물건이나 오브제를 감쌀 때 투명한 틈새를 통해 원래 오브제의 재질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파란 천이 물건을 덮어버릴 때 오브제가 균질화된다고 한다면, 레이스는 사용된 오브제를 보다 개별적으로 관객이 관찰할 수 있게 허용한다. 레이스의 투명한 면을 뚫고 오브제 표면의 이미지가 투영되면서 독립적인 개체나 섬과 같이 서 있는 오브제는 관객의 눈앞에 자기를 드러낸다. 작가가 주장한 바와 같이 어둠 속에 갇힌 밤으로부터 무엇을 구현해내듯이 말이다. 그 과정에서 물건을 택하고, 만지고 감싸는 작가의 손이 다시금 연상된다.

    -흙을 다시 만지다.
    "...여태까지는 공간 설치가 주를 이루었기때문에 재료를 대량으로 제작한다든지 작업들을 커다란 공간에서 설치하는 데 중점을 두었는데 이번에는 뭔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학부를 졸업하고는 제가 흙을 만져본 적이 별로 없었던 거예요." (조은필, 인터뷰)

    조은필은 설치작가로서 자신이 이제까지 공간을 덮어서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파란색의 기운이 전체 공간을 압도하는 효과를 만들어내고자 하였다. 조각가이지만 화가가 화면을 채우듯이 파란색으로 칠해진 자신의 오브제가 공간을 채워가는 효과에 작가는 더 관심을 기울였다. 2005년 영국의 슬레이드 학교 재학 시 작은 스튜디오를 채우는 설치작업을 한 이후로 작가는 한 시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공간이 꽉 차 있어 보이는 설치를 진행해왔다. 야심 있고 부지런한 젊은 작가들이 그러하듯이, 그야말로 천으로 공간을 채워나갔다. 물론 규모도 남달랐다.

    최근 조은필의 작업에서 연속적인 전체 공간보다는 개별적인 오브제의 물질성이나 재료 특유의 표면이 돋보인다는 것은 눈에 띄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설치는 더 이상 특정한 관점에서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이 아닌 관객 스스로가 작은 오브제 사이를 오가면서 감상하고 조우하는 흩어진 장이 되었다. 부산 ‘어컴퍼니’에서 열린 개인전 <조은필: 흔적의 모양>에 선보인 도자로 만들어진 조각이나 설치에서 특유의 블루 색상이 등장한다. 그러나 안료를 화면에 적용하고 표면에 유약을 칠하며 굽는 과정은 천으로 전체 오브제를 쌓아놓는 방식과는 다른 ‘공정’을 거친다.

    일단 작가는 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조은필에게 익숙하지 않던 도자라는 매체는 작가가 처음 흙을 만들면서 소조를 배우던 시절로 작가의 기억을 되돌린다. 물론 도자기 기술은 조은필에게 그다지 익숙한 것은 아니지만, 작가는 자신이 만드는 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도자기가 아니라고 한다. 기능적인 용처에 따라 특정한 틀, 재료, 크기, 형태를 정하고 그에 따라 제작해가는 도자기와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일단 표면의 이곳저곳 불규칙하게 금이 가거나 흙이 구워질 때 만들어지는 균열을 그대로 품고 있는 조은필의 작업은 매끈한 공예 작업이나 상품과는 다른 종류의 도자기(?)이다. 물론 순수예술가가 만드는 창작물을 단순히 용기에 비교할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흙을 통해서 빚어낸 결과물 자체가 아닌 손을 이용해서 흙으로 무엇인가를 빚어내는 일련의 과정은 주목할만한 변화이다.

    조은필은 재료가 지닌 고유의 물질성과 에너지에 주목하는데, 이것은 거대한 천이 각종 오브제가 지닌 고유의 형태, 재질, 색상을 무시하고 덧입혀지는 것과 달리 개별적인 오브제가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배려한 결과이기도 하다. 작가는 최근 아파트 발코니를 화분으로 메웠으며, 외부 세상과 단절되었던 동안 식물과 대화를 이어갔다고 한다. 코로나 팬더믹으로 인해 격리되어 있는 기간 동안 자연스럽게 작가의 발코니에는 28개의 화분이 쌓였고, 생명력에 대해 관심을 지니게 되었다. 나아가서 식물의 생명력에 대한 관심을 흙을 비롯하여 테라코타와 도자의 기본을 이루는 자연적인 물질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각 개체에 대하여 좀 더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는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갖게 된 셈이다. 덕분에 조은필 작업에서 돋보여 왔던 역동적인 인상이 극적으로 굽이치는 천을 통해 ‘재현(represent)’ 된다기보다는 쉽게 눈으로 관찰되기 힘든 식물이 품고 있는 에너지, 혹은 작업과 작업을 둘러싼 환경이 전달해주는 에너지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암시되고 있다.

    -상수와 변수: 반복과 변화의 갈림길에서
    미술사가 조지 쿠블러(George Kubler)는 <시간의 형태(The Shape of Time)>(1962)라는 유명한 저서에서 역사적으로 문명이나 양식의 변화가 다양한 시간과 공간적 반향을 지닌다는 사실을 이론화하고자 하였다. 1950-1960년대 ‘사이버네틱(cybernetics)’이라는 정보학, 혹은 시스템 이론의 태동기에 쿠블러는 어떻게 특정한 시기에 양식이 등장하게 되고 양식의 변화가 이에 더욱 저항하는 집단이나 이를 더욱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집단에 의하여 전개되는지를 설명한다. 반복을 통한 특정 양식이나 생각의 영속성과 변화는 지속해서 드러나게 되지만 그것이 관찰되고 현현되는 방식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쿠블러에 따르면, 변화는 특정한 한 양식에서. 사회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변화를 촉발하는 요인들은 산재해 있지만 변화가 지속되는 시간이나 그 영향력을 미치는 공간적 영역에 따라 변화는 외형적으로 더 드러날 수도 있고 쉽게 지나가거나 끝내 인식되지 못하고 소멸되기도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변화와 함께 변화에 맞대응하는 기존의 양식 또한 급작스럽게 나타난다기보다는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부연 설명하자면, 변화의 양상은 기존 양식과의 관계성 속에서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으로 진화하게 되어 있다. 특히 이러한 과정에서 예술가는 변화에 민감한 이들이자 주로 변화를 주도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예술가의 존재 방식이나 이유 자체가 기존의 특정 양식이나 사고에 반하는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특정한 시기의 주도적인 양식, 사고의 전환에 있어 변화의 물꼬를 트는 이들로도 유명하다.

    조은필의 예로 돌아와 보자. 조은필은 파란색으로 덮힌 거대 설치 작가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그의 최근 설치 작업은 다양한 방향으로 진화 중이다. 특정 시점에서 회화를 관찰하듯이 한 면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광경에 가까운 설치가 있는가 하면은 관객이 조각 작업 사이 사이를 누비면서 오브제의 개별적인 표면을 가까이에서 감상하게 하는 설치 작업도 있다. 최근 어컴퍼니에서 선보인 개인전 <흔적의 모양>은 후자에 해당한다. 변화는 단순히 외관상 작업을 감상하는 방식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작가는 작업 개별적인 오브제를 만드는 도자 작가로도 변모하는 중이다. 그의 주된 장르가 확장된 모양새이다.

    조은필을 잘 알려지게 한 특유의 블루 색상은 쿠블러의 표현에 따르면 ‘영속성(duration)’에 해당하는 상수(constancy, 常數)라고 할 수 있다. 반복적이고 영속되는 ‘상수’는 작가가 변화를 꾀하고자 할 때마다 변형의 지점들을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물론 파란색은 <흔적의 모양>전에서 미묘하게 이전 블루 색상과는 다른 울림을 갖고 있다. 파란색은 균열된 도자의 표면이나 유약과 만나면서 좀 더 불규칙하게 보인다. 관객이 근거리에서 관찰하는 것이 가능해졌기에 관객의 입장에서 멀리서 설치를 바라볼 때와는 다른 색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제까지 조은필의 설치에서 표면은 좀 더 극적이고 만들어지며 인위적인 인상을 풍겨왔다. 작가는 각목이나 다른 기재를 사용해서 천의 굽이치는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파란색의 천은 그 밑에 위치한 오브제를 덮어버리면서 다변화된 물질성과 촉각성을 배제해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시각과 촉각에 대한 미술이론을 인용해보자면, 조은필의 설치는 흔히 조각에서 강조되어온 재료의 ‘촉각성(tactility)’을 회화적인 ‘시각성(visuality)’으로 치환했다고도 볼 수 있다. 반면에 최근 도자 작업은 강렬한 블루 색상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감춰진 흙에 관한 관심을 부각한다. 변하지 않는 블루와 그 이면의 표면의 효과가 새로운 변수(variable, 變數)로 작동하고 있다.

    조형물에 삽입된 식물, 특정 건물 구조를 보여주는 벽면에 설치된 부조, 창문에 비치는 햇빛과 그림자를 활용한 설치는 작가가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변수’를 도입한 결과이다. 식물과 같이 생명력을 암시하는 설치물, 전시장의 복잡한 구조나 자연광은 미술관이나 갤러리의 화이트박스에서 행해진 설치전에서는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했다. 반면에 <흔적의 모양>에서는 세부적인 주위 환경이 작업의 부분으로 끌여들여 오면서 일괄적이고 극적인 파란색은 점차 관객의 움직임, 조명, 외부 건축적인 환경과 자연광의 위치에 따라 미묘하게 변한다.

    조은필 작업의 또 다른 상수는 연극적인 설치 방법이다. 그의 장소 특정적인 설치는 언제나 특유의 우월시점(Vantage point)을 지녀왔고 덕분에 사진 찍기에 좋은 전경이 연출해왔다. <흔적의 모양>에서 설치물에 나뭇가지를 삽입하는 방식은 그가 구가해온 연극적인 연출의 한 방식이다. 보기에 따라서 조각이 아닌 회화처럼 전체를 아우르고 관객이 무대를 바라보듯이 특정 시점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반면에 이번 전시에서는 연극적인 무대연출의 규모가 작아지고 자연조명과 같이 더욱 가변적인 요인이 두드러지면서 전에 비해서 우월적인 시점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작은 도자는 여러 각도에서 관찰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갤러리 창문을 통해서 비친 빛과 그림자가 작품에 드리워지는 경우 인공광선과는 달리 시간대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 흡사 무대가 계속 변화하면서 관객이 무대를 바라볼 때 받게 되는 인상도 변화하듯이 말이다. 연극적인 무대연출은 최근 조은필의 작업에서 좀 덜 영속적이고 가변적인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쿠블러가 주장한 바와 같이 지속적이고 영속적인 상수와 임의적인 변수는 언제나 공존한다. 단지 이른바 각각의 요소가 어떠한 ‘영속성’을 갖고 결합하고 일정 시간이나 공간에 영향력을 미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읽기와 해석이 달라질 뿐이다. 쿠블러의 설명을 빌리자면, 조은필의 작업 또한 상수와 변수가 어떠한 방식으로, 혹은 비율로 작업에서 나타나는가에 따라 관객에게 달리 감지될 것이다. 반복되는 상수에 해당하는 파란색과 여타 재질, 주위 환경에 대한 관심, 생태계와의 연관성과 같은 최근 변수가 어떻게 결합될 것인가에 따라 작가의 발전과정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때로는 개인사적인 변화, 혹은 내외적인 미학적 요구에 따라 지속해서 변수가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의 경력을 시스템 이론에 따라 해석하는 것과는 별개로 작가가 변화의 시점에서 고민해야 하는 것은 결국 근본적인 태도와 연관된다. 작가는 관객과 무엇을 소통하고자 하는가? 어떤 관객을, 어떤 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만나고자 하는가? 자칫 반복은 매너리즘으로 이어지지만, 마찬가지로 변화 또한 무섭고 어려운 일이다. 파란색이 간과하거나 놓쳐버렸을 수 있는 생명력의 문제는 어떻게 다시금 설치 작업에 끌어들일 것인가? 결과로서의 역동성이 아닌 작업의 내용 자체가 역동적으로 조성되고 형성되기 위하여 얼마만큼 관객의 능동적인 관찰을 가능하게 할 것인가? 얼마만큼 외부 환경의 다각적인 요인을 작품 내부로 끌어들일 것인가? 전시장 공간을 각종 파란색의 매개체로 덮어온 조은필의 작업이 지닌 역동성, 변수가 더 무궁무진해지기를 기대해본다.

  • 어둠의 감각 : 블루의 변주 -- 이미정

    밤의 정적은 내면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어준다. 주변의 공기는 조용히 내려앉고, 사방의 사물들은 그제서야 저마다의 기운을 뿜어낸다. 생경하고 낯선 시공간. 조은필 개인전 《어둠과 물이 만났을 때》(2021. 5. 14 - 6. 20, 부산 프랑스문화원 ART SPACE)는 이러한 어둠의 시간에서 만나는 감각을 정교하게 포착한다. 반원형의 대형 구조물, 태초의 생명으로 상징되는 식물과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오브제들, 그리고 커튼 너머 외부의 풍경을 보여주는 비디오 작업으로 구성된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짙고 파란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마치 조은필이 매일 밤 혼자 정처없이 나섰던 산책의 길처럼 펼쳐진 공간 속으로. 전시장 입구의 반원형으로 열린 대형 오브제에는 이전의 작업에서 등장했던 ‘나무’ 아래에 서식하는 어둠의 식물이 생명의 근원을 떠올리는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새겨져 있다. 고사리류 같기도 하고, 식물처럼 보이는 동물인 에디아카라기(Ediacaran Period)의 한 유기체를 연상시키는 이 이미지는 인간과 함께 진화하고 있는 생명의 힘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상 너머로 보이는 안과 밖의 경계와 전시장 벽면을 따라 펼쳐지는 거대한 그림자는 밤을 걷는 일상의 경험은 물론 낯선 공간에 대한 체험을 동시에 하게 해준다.

    이러한 경험은 조은필의 블루가 어둠의 시간으로 재현되는 순간이다. 하나의 공간 혹은 총체적인 형태로서의 블루가 어두운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간은 또한 모든 것이 생소한 공간이자 어느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공간과 연결된다. 침투할 수 있지만 투명하지 않고, 열려 있으면서도 닫혀 있는 알 수 없는 시공간. 이것은 그의 블루를 향한 집착과 동경이 수용과 인식의 과정으로 이행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조은필의 블루는 이제 세상을 향한 시선에서 세상을 경험하고 감각하는 자의 시선으로 전환된다. 압도적인 느낌으로 공간을 장악하던 블루는 인간과 자연이 함께 해 온 시간의 단면을 시각화하는 생명의 표현으로 자리잡는다. 블루는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자라나는 유기체로 확장된다. 어둠을 먹고 꽃피우는 식물. 조은필의 블루는 이제 이러한 복합적이고 유기적인 맥락에서 이해가능하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는 상이한 감각들로 지각된 어둠의 세계는 우리 시선 너머의 풍경을 묘사한 비디오 작업으로 극대화된다. 창 너머의 밤의 풍경은 천천히 다른 세계, 어둠의 물 속 풍경으로 순환을 반복한다. 태초의 순간을 연상시키듯 흔들리며 일렁이는 심연의 물속 풍경은 블루에 반응하는 조은필의 조형적 감각과 균형이 동시에 발현된 동적인 모티프이다.

    이번 전시가 흥미로운 지점은 조은필이 그동안 선보여온 설치 작업을 한 단계 넘어서 ‘블루’라는 개념을 어둠, 즉 시간의 흔적이 드러나는 공간으로 확장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사유로 끌어내고 있다는 데 있다. 이전의 파란색의 공간이 조은필이 구성한 자신의 세계였다면, 이제 그의 전시 공간은 세계로 향하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 가장 검은 빛에 가까운 오브제로 어둠의 끝을 보여주는 기둥, 힘없이 고개를 떨군 화병의 꽃과 무겁고 끈적하게 떨어진 그림자, 물기를 머금고 늘어진 수초 그리고 시간의 흔적이 쌓인 나무의 나이테. 이렇게 어둠의 공간 속 사물을 형상화한 오브제들 사이를 거닐어본다. 세월을 지나면서 새겨진 자국과 상처들, 태초의 식물에서 영감을 얻어 구성된 상징적인 이미지로 엮인 밤의 산책길은 블루의 공간을 넘어 어둠을 향하는 비밀스런 통로가 된다. 조은필이 지나온 것은 이러한 어둠의 시간이었을까? 코로나 19로 사상 초유의 답답하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우리는 이미 이 어둡고 축축하며 무겁고 깊은 파란색의 세계를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지금까지 집착하면서 형성해온 존재와 그 존재에 달라붙어 있는 심연의 어둠을 비로소 마주하고 그 경험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어둠의 파란 방이 우연과 의도 속에서 배치된 하나의 무대라면, 그 의미는 관객의 움직임과 동선이라는 관계망 안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블루라는 컬러를 압도적인 스케일과 디테일로 표상했던 기존의 작업은 이제 블루를 통해 작가 자신에 대한 감각적 인식의 단계로 나아간다. 조은필은 자신만의 색, 블루를 만들어내는 단계를 지나 그것으로 공간을 축조하고 점유하는 단계를 넘어 마침내 그것을 하나의 통합된 감각의 세계로 치밀하게 직조해낸다. 색色에서 형形으로, 공간에서 시간으로, 시각을 넘어 촉각으로, 직접적이기기보다는 우회적으로, 스펙터클함을 넘어 관조의 시선으로, 자신만의 블루를 거듭 넘어서고 변주하면서. 우리가 조은필을 주목하고 기대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 모든 것이 가능한 시간, 어둠으로부터 -- 박진희 (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

    조은필은 ‘블루’라는 색채로 초현실적 시공간을 관객에게 선사하는 설치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제까지의 작가의 작업세계는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방식으로, 때로는 압도하는 스펙터클로 다가왔다. 다시 말해 조은필의 ‘블루’의 색채로 이어진 세계는 현실세계의 변환이자 판타지의 세계이다. 그리고 작업 속의 오브제들은 ‘블루’라는 코드로 그 존재성이 지워지거나 의미가 탈색되어 제시되어졌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보이는 그의 작업세계는 공간. 시간을 담은 대상들에 모든 감각을 열어 접근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싶다. 이전의 공간. 대상의 드러냄에서 ‘블루’가, 색채가 가지는 위치를 전복시키고 대신 시간이라는 개념. 켜켜이 쌓이는 역사. 시공간의 순환체계에 더욱 집중한 듯 보인다.

    그 변화는 무엇으로부터 온 것일까. 작가는 이전까지의 작업세계가 공간을 장악하는 판타지로의 방향성이었음을 인지하였고, 그 덩어리 지워진 환영받았던 세계를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주변 세상과 사물들에 대해 다시 귀 기울였다. 빛에 의해 형상이 드러나고 인간에 의해 이름 지워진 자연물들은 밤이 되면 그 형태와 색과 온도와 촉감들이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대상들은 차츰 작가에게 새로운 지각체계를 흔들며 드러났고, 작가는 예술가의 촉을 세우고 들여다보았다. 그리하여 작품들은 색채로 덮여 환상의 세계의 구조물로부터 분리되었고, 블루라는 어두운 심연으로부터 떠올라 서사를 가지고 시간성을 회득하는 예술작품이 되었다.

    이러한 열린 지각은 이번 전시에서 비침이 있는 블루 색의 패브릭이라는 소재가 등장하면서 명료하게 설명된다. 패브릭은 개별 작업들의 표피로 대변되었다. 이번 전시에서 ‘블루’는 ‘어둠’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작가에게 어둠은 빛의 상실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물의 이름 지어진 존재성을 잠시 보류하게 하는 현상으로 인지되었다. 어둠속에 있는 존재들은 밝은 공간에서의 의미를 뒤로하고 다른 의미가 있음을 상상하게 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어둠이라는 의미를 획득한 비침이 있는 유연하고 푸른 패브릭은 이어붙이거나 올을 풀어내는 행위가 수반되어 납작한 질감을 버리고 풍성한 감각과 감성으로 발현되고 있다.

    조은필의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된 일련의 패브릭 작업노동은 작업을 구성하기 위한 자기통찰이 뒷받침 된 예술행위라 할 수 있다. 반복된 행위는 시간성과 노동이 함께 동반하며, 몸의 감각과 감성의 지각을 예민하게 일으키게 한 듯하다. 이러한 일련의 수행적 행위와 예술태도는 조은필의 이전 작업에서 보이는 푸른 공간의 강한 에너지. 판타지를 만드는 의지를 유연하게 만드는 기회가 된 듯하다. 저 너머의 대상이 어렴풋이 보이고 시공간의 여백을 만들어낸 전시 공간 속 작품들의 풍경이 그러하다.

    작품 <모든 것이 가능한 시간>의 경우 겹겹이 겹쳐진 블루 패브릭으로 이루어진 대형 구조물의 설치작품이다. 하나의 형태. 입체성으로 구현되는 푸른 패브릭의 덩어리는 시간의 끊임없는 흐름을 연상하며 동력으로 돌아간다. 운동한다. 순환의 섭리가 존재하는 듯하다. 시간은 흐르고 시간의 결은 결국 쌓이게 되어 하나의 ‘푸른 덩어리’를 이룬다. 이전의 사물을 덮어버리고 환상을 생성했던 블루라는 코드가 이번 전시에서는 ‘비워지기 시작한 주체’, ‘시공간의 형(形)’을 인식하게 하면서 그 역할이 확장된 것이다.

    또한 이번 전시에서는 조은필의 ‘시간이라는 것의 초월된 개념’에의 의식이 특히 드러나는데, 빙글빙글 돌아가며 운동하는 순환체계가 형상물질로 변환된 작품들이 그렇다. 시간이 축척되어 형태를 이루는 작업과 땅과 하늘이 겹쳐지고 위와 아래가 뒤섞인 체계의 푸른 자연 또한 빙글빙글 돌아간다. 영상작업 <모든 것이 가능한 시간>도 그러하다. 그의 작업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은 기존체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추상적 개념의 흐르는 시간은 푸른 천이 겹겹이 쌓여 높은 오브제의 물질성으로 발현된다. 시간의 축척이 입체구조의 높이로, 오브제로 멈추어버렸다. 작품 <어둠의 시간>은 바람에 의해 살랑거리는 커튼설치작품이다. 공기의 흐름. 공간에서의 순환. 그리고 매체가 가진 유연함의 절정의 감성과 밤의 감수성을 보여준다. 이전의 공간을 정복하는 의도가 시간을 멈추고 존재성을 유연하게 드러내는 의도로 전환된 것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도 조은필의 작업들은 ‘시간의 물질’이라는 덩어리로 또 다른 판타지 공간을 만들어내었다.

    전시장에 설치된 작품들은 겹겹의 시간이 물질로 변환되었고, 패브릭의 비침은 안에 있는 사물들을 감싸안음과 동시에 사물의 명명된 존재성을 해방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 풍경은 한 공간에서 개별체로 존재하기도 하며, 동시에 하나의 통합된 구조로 인식되기도 한다.

    작품 <어둠의 시간 -돌>을 보자. 푸른 패턴의 레이스는 돌덩어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블루’의 색채미감은 ‘어둠’으로 치환되었다. 어두움은 사물의 존재성을 더욱 드러나게 한다. 작가는 푸른 어둠으로 싸인 이 돌덩어리가 자연계의 물체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로 확장되기를 의도하였다. 이전의 푸른 패브릭이 공간과 사물을 덮고, 판타지를 만고 시각적 정복의 장치로 이용되었다면 이번 작업에서 푸른 패브릭은 대상과의 조우. 노동 수행의 결과물로 오브제를 감싸고, 그 명명되어진 개념을 추상화시켜 확장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 의도. 변화를 작가는 새로운 감수성의 일렁임으로 인지하고 관객과 공유하기를 바라는 듯하다.

    이번 전시는 조은필의 세계를 치열하게 갈구하며 얻어진 열린 지각을 관람객과 호흡을 짙게 하려는 의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끊임없이 변화하며 나아가는 예술가는 외롭다. 그러나 그 치열한 고민은 작품으로 승화되고 타존재와 만나 다른 세계를 열어줄 것이다.

  • 별을 내려다보는 밤 - 물질적 상상력이 미술이 될 때 -- 김성호 ( 미술평론가 )

    프롤로그
    《조은필 개인전 - 별을 내려다보는 밤》에는 푸른색 풍경이 자리한다. 벽면에 투사되고 있는 짙푸른 코발트블루의 영상, 천장에 매달린 채 회전 운동을 하는 푸른색의 천, 벽면에 도열되어 있는 오래된 액자를 둘러싼 푸른색 직물이 발하는 ‘블루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관객은 작가가 숨겨 놓은 푸른 밤과 푸른 별을 맞이한다. 전시 속에 숨겨둔 블루의 밤과 별?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순전히 관객이 ‘마음의 눈’으로 보고 읽도록 이끄는 작가 조은필의 개인전 속 메타포(metaphor)라 할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말대로 “행동, 개념, 물체 등이 지닌 특성을 그것과는 다르거나 상관없는 말로 대체하여, 간접적이며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무엇으로,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복수의 조형적 은유’라고 할 수 있겠다.

    I. 밤과 별 - 복수의 은유
    조은필은 이번 개인전을 “사물이나 어떤 것을 단지 일상의 그것으로 인지하기보다 모든 것을 묘하고 생소하게 보이게끔 하는 것에서 출발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번 전시는 “시간이라는 것도 공간이라는 것도 우리가 경험했던 방식과는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싶은” 작가의 의도를 여실히 드러낸다. 이러한 의도는 ‘별을 내려다보는 밤’이라는 주제명에 함축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즉 ‘별’은 실제의 전시장에서 볼 수 없지만, 그것을 ‘눈(육안)’이 아닌 ‘다른 눈(심안)’으로 볼 수 있다는 ‘잔잔한 역설’이 맞물리는 것이다.
    ‘별을 내려다보는 밤’이라고 하는 도치법(倒置法)에 기초한 시적 표현의 주제는 또 어떠한가? 이 주제에는 작가 조은필의 ‘지각 관점의 전복이나 관성을 탈주하는 해석’ 또는 ‘어떠한 메타포’가 한데 겹쳐진다. 이러한 주제는 별을 별(星)로, 밤을 밤(夜)으로 지칭하는 ‘텍스트 지시성’이라는 고정적인 의미의 경계를 허물고 시적 상상력으로 또 다른 해석을 가능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그런 면에서 조은필의 개인전에서 ‘별’과 ‘밤’은 우리를 다른 생각과 해석으로 이끄는 하나의 메타포이다. 즉 상상력으로 실천하는 ‘은유 전략’이라 하겠다. 그것은 복수적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생각해 보자. 작가가 내세우는 주제어 ‘밤’이란 그 자체로 수많은 은유를 껴안은 신비의 시간이다. “밤이라는 시간은 모든 것을 모호하게 하기도 감상에 빠지게도 하는 마법과 같은 시간이다. 그리고 낮이라는 시간의 빛을 차단하고 이내 기존의 세상이 가진 색을 잃게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작가의 말처럼 밤은 낮 동안의 익숙한 모든 것들을 낯설게 만드는 존재이다. 시지각의 착각, 오해 등을 이끌면서 ‘어떠한 것들’을 ‘다수의 다른 것들’로 인식되도록 만들기 십상이다.
    ‘밤’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의 어둠의 공간이자, 어둠으로 인해 실재를 판별하기 어렵게 만드는 시간이다. 따라서 ‘밤’은 마치 주체/객체, 시간/공간이 뒤섞인 현상적 존재이다. 그것은 마치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가 플라톤으로부터 차용해서 언급하고 있는 코라(Chora)와 같은 외디푸스 이전의 혼성적 시공간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사물 인식에 대한 판별 불가나 오판을 끌어냄으로써 피상적으로 부재와 혼성의 공포를 함유한 네거티브의 시공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밤은 다른 차원에서 포지티브의 시공간으로 작동한다. 크리스테바가 언급하는 코라가 어원상 의미에서 ‘우주의 자궁’이란 별칭을 가진 것처럼, 밤은 이내 잉태와 생성을 야기하는 포지티브의 시공간으로 현현되기에 이른다. 밤이란 현실의 실재를 소멸시키고 부재의 어둠으로 내모는 시공간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상상을 현실에 덧씌우고 실제와 다른 환상의 존재를 불러오는 시공간이기도 한 까닭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밤은 보이지 않는 것이자 동시에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부재/존재, 소멸/생성을 한꺼번에 껴안은 시공간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밤은 대립되는 많은 것들을 어느 것 하나 배척하지 않는 수많은 은유를 불러온다. 부재/존재, 소멸/생성뿐 아니라 시간/공간과 같은 물리적 개념을 뒤섞고 공포/평안과 같은 심리적 개념마저 한 몸에 품어 안는 수많은 ‘복수의 은유’와 접속한다.

    II. 보이지 않았던 것들 - 푸른 기호
    조은필의 개인전에는 밤과 별로 대별되는 ‘복수의 조형적 은유’가 전시장 전체를 유영한다. 그것은 ‘보이는 것’ 이면에 실존하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의미화 과정을 구체화시키는 무엇이다. 달리 말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지각과 인식의 의미론적 실천’이다. 그래서 그녀의 은유의 전략은 ‘기호 작용(sémiosis)’, 더 정확히는 시각 기호(signe visuel)의 과정’을 주저 없이 껴안는다. 그것이 무엇인가?
    조은필의 개인전에서 복수의 은유를 품은 ‘별’과 ‘밤’은 ‘푸른 밤과 푸른 별’로 대별되어 나타난다. 우리가 유념할 것은 그녀의 전시에서 푸른빛은 밤과 별을 특정한 의미를 지시하거나 형상화해서 드러내지 않고 기호처럼 시각화될 따름이라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푸른빛은 별과 밤을 잇는 필연성을 내포하지 않는다. 그저 오랜 시간 인구들에 회자되면서 동시대 사람들이 여전히 사용해 온 이미지와 맞물리면서 연동되는 기호로서 기능할 따름이다. 즉 푸른빛은 자의성, 사회성, 역사성을 거쳐 ‘별/밤’과 맺어진 기호인 것이다. 그래서 짙은 어둠의 우주 속 떠도는 푸른 별이나 축축한 우주의 습기를 먹은 별을 연동하거나 혹은 미명의 푸르른 새벽하늘을 품은 청연(淸姸)한 밤을 연동시킬 때도, 푸른빛은 단지 ‘별/밤’과 자의성, 사회성, 역사성에 기초한 기호로 맺어진 것일 따름이다.
    조은필이 작가 노트에서 “전시에 등장하는 푸른색은 단지 기호의 색이 아니라 어둠, 밤”임을 진술하고 있듯이, 그녀의 블루는 기호와 은유가 연동한다. 따라서 조은필의 이번 개인전에서 창출되는 ‘밤의 시공간’은 ‘별과 밤’이 잇는 ‘복수의 조형적 은유’와 ‘푸른빛의 시각 기호’ 혹은 ‘블루 기호’와 연동하면서 밤의 시공간을 창출한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개인전이 표방하는 ‘별을 내려다보는 밤’이라는 주제는 하나의 거시적 은유이자 기호로서 b, c, g, s, t라는 또 다른 미시적 은유와 기호들을 아우른다는 것이다. 즉 이번 개인전에 등장하는 돌, 나무, 액자와 같은 무수한 ‘발견된 오브제들(objets trouvés)’은 고유의 사물성이 명확하지만, 전시에 등장하는 각 작품을 ‘별을 내려다보는 밤-s’, 별을 내려다보는 밤-t, 그리고 별을 내려다보는 밤-g‘와 같은 방식으로 b, c, g, s, t와 같은 불명료한 문자 기호를 연동시킴으로써 ’사물이 품은 의미‘를 확장한다는 것이다. 즉, 각 작품에 특정 사물을 연상케 하는 영어 단어(bubble, conch, gown, stone, tree)의 맨 앞쪽 알파벳만 표기하여 ‘불명료한 지시 기호화’를 실행함으로써 눈에 빤히 보이는 사물의 특성 아래 숨겨져 있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수면 밖으로 드러내고 그 고정된 의미를 확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브제의 피부를 덮은 푸른 직물이나 안료는 그 의미의 확장을 이끄는 ‘시각적 기호 작용의 주체’이자 언어와 비언어 사이를 연결하는 ‘유의미한 매개 주체’가 된다. 즉 ‘복수의 은유’를 연동하는 ‘푸른 시각 기호’인 셈이다.

    III. 살아나는 오브제들 – 물질적 상상력
    조은필이 일상의 공간으로부터 전시장이라는 예술의 공간으로 가져온 사물들, 즉 ‘발견된 오브제들’은 블루의 피부를 덧입고 미술 작품으로 변모한다. 그것은 일상품에서 예술품으로의 자격 전환을 시도한다. 또한, 오브제들은 블루의 마술에 의해서 ‘보이지 않는 것들’로부터 ‘보이는 것들‘로, ’죽은 것들로부터 살아나는 것들‘로 전환된다.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비가시성으로부터 가시성으로 변환되는 지점의 매개 주체는 블루의 빛이나 물감 혹은 블루의 직물이다.
    우리가 유념할 것은 조은필의 작업에서 블루라는 시각 기호가 낳은 밤과 별이라는 복수의 은유는 ‘잠재적 움직임(Mouvement virtuel)’이든 실제적 움직임(Mouvement réal)이든 ‘운동성’을 동반하게 되면서 죽어있는 사물들에 비로소 생명력을 부여하고 살아나는 사물들로 변모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바슐라르(G. Bashlar)식으로 ‘시적 상상력(Imagination poétique)’에 덧붙여 ‘물질적 상상력(Imagination matérielle)’으로 칭하기로 한다. 오늘날의 창조적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몽상이 야기한 시적 상상’이란 바슐라르의 관점으로 말하면 ‘의식의 흐름’이다. 그것은 운동성을 동반한다.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 또한 움직임을 동반한다. 그에 따르면, 대상의 표면에 머무르는 ‘형태적 상상력’(imagination formelle)이란 얼음의 외형처럼 고정화된 것일 뿐이고 대상의 표면과 내면이 함께 침투하는 ‘물질적 상상력’(imagination matérielle)이란 얼음, 물, 수증기처럼 변화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은필의 작업이란 ‘형태적 이미지’(image formelle)를 벗고 되찾은 ‘물질적 이미지’(image matérielle)라 할 만하다. 왜?
    조은필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보자. 작품 〈별을 내려다보는 밤-b〉는 전시장의 벽면을 ‘버블 건을 쏘아 만든 천’으로 둘러싼 것이다. 버블은 완성된 작품 속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단지 얼룩진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이지만, 창작의 과정에서는 보이는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생성과 소멸을 거듭했던 운동체였음을 우리는 간파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완성의 결과물은 정적이지만 결과에 이르게 한 과정은 동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또 다른 작품 〈별을 내려다보는 밤-s〉에서는 창작의 과정이 동적임은 물론 그 결과물 또한 움직이고 있는 운동체의 존재임을 가시화한다. 그것은 돌이다. 조은필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 과연 가만히 있는 것일까”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돌에 관한 작품을 시작했다. 생각해 보라. 광물성의 ‘돌’이란 무생물, 무기체이며 ‘그 자체로 있는’ 즉자적(An-sich) 존재일 따름이지만, 그녀의 ‘만들어진 돌’은 ‘자신을 스스로 객관화시켜 반성적 성찰을 거듭하는 인간과 같은 대자적(für sich) 존재’로 은유되거나 더 나아가 헤겔(Hegel)식의 ‘즉자적 대자(an und für sich)’와 같은 변증법적 존재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즉 불과 땅이 만난 화성암(火成巖)처럼 단단해지고(생), 물, 불, 공기, 땅을 만난 변성암(變成岩)처럼 시련을 겪다가(로병) 퇴적암(堆積巖)처럼 흙과 땅의 몸을 섞는(사) ‘돌의 순환(rock cycle)’적 삶 자체는 이미 운동성의 과정에 있는 존재이다. 작가 조은필은 푸른 안료를 묻힌 돌 위를 스쳐 가는 ‘직물의 회전 운동’을 실행하는 기계 장치를 통해서 여러 돌 위로 안료를 지속적으로 묻혀간다. 그것은 잠자는 것으로 보이는 사물 위에 덧입히는 작가의 ‘물질적 상상력’이라고 할 만하다. “조명과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뒷골목 작은 무대의 모노드라마의 주인공과 같은 느낌”을 보여주려고 의도했던 조은필의 이 작품은 ‘사물 위에 덧입히는 물질적 상상력’으로 인해 “작고 생명력이 없고 미약하지만, 그것을 더 강조하고 싶은 의도”를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IV. 에필로그
    글을 마무리하자. 앞서 언급한 작업들 외에도 어린 시절 추억 속의 인형 놀이가 회전하는 푸른 천 작업으로 소환된 〈별을 내려다보는 밤-g〉이나, 스테인리스 미러 위에 뿌려진 미디엄 섞인 푸른 안료를 천천히 회전 운동을 하는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깃털이 펴 바르는 작업인 〈별을 내려다보는 밤-t〉는 ‘별과 밤’이 잇는 ‘복수의 조형적 은유’와 ‘블루의 시각 기호’와 연동하면서 추상적인 개념의 밤의 시공간을 창출하는 것들이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고, 죽은 듯 보이는 것들을 살아나게 하는 운동성의 미학과 더불어 시적 상상력과 물질적 상상력이 작동한다.
    특히 작품 〈별을 내려다보는 밤-t〉는 스테인리스 미러 위로 투영된 낯선 천장의 이미지에 주목하게 만듦으로써, 쉬이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존재 의식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그것은 작품 〈별을 내려다보는 밤-g〉에서 선보이는 푸른 천으로 된 구조물의 회전 운동으로부터 ‘나무의 수직적 성장’ 속에 가려졌던 ‘나이테를 만드는 나무의 수평적 자라남’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조은필의 이번 개인전은 우리가 관성적으로 인식하던 모든 것들에 대한 전복과 도치, 그리고 일반적인 사유의 틀을 넘는 ‘시적 상상력’과 ‘물질적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사물에 대한 경험’을 선사한다. 그것은 작가의 언급대로 “이상하고 웃기기도 하고 뭔지 모를 그런 느낌”이나 “어울리는 듯하지만, 비논리적인 조합으로 (중략) 이상하고 또 환상적인 느낌”을 선사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분명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경계의 주변을 넘나드는 오묘(奧妙)의 영역이다. 달리 말해, 경계 사이의 ‘탈(post, anti)’과 합(complex, fusion)을 동시에 실행하는 ‘이것과 저것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호함과 묘한 위상의 무엇이다. 아래 작가 노트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이러한 ‘묘한 위상’은 이 글이 언급한 ‘시적 상상력’과 ‘물질적 상상력’과 매우 유효하게 어우러지는 개념이다. 아래 작가 노트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상상이란 ‘꿈(dream)’이란 명사형이기보다 ‘꿈꾸기(dreaming)’라고 하는 동명사 즉 명사의 기능을 하는 동사 형태로 늘 ‘묘한 경계의 지점’에서 변화하고 약동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전시 ‘별을 내려다보는 밤’은 위에 언급한 점들을 바탕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적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것들이나 바로 그것을 다른 차원에서 생각하고 모호하고 묘한 지점으로 보여주고 싶은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 시간을 통한 形으로의 回歸(회귀) -- 임수미 ( 2020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총감독 )

    色(색)의 판타지

    “나의 블루에 대한 집착은 강박에 가깝다. 내 공간을 그 색으로 메우고 싶다. 공간은 늘 사물을 품고 있다. 그 사물도 다 파랗게 덮어버린다. 그리고 그 블루의 힘은 강해져서 보다 효과적으로 나를 둘러싼 세계의 영역으로 변모시킨다. 나의 사물이나 공간은 제한되어 있지만 그 속에는 우주, 바다 같은 무한함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한계 또는 유한함에 대항하는 질긴 ‘의지’ 그 자체인 것이다. 우주나 바다에 대해 무한함으로 비롯되는 경이와 공포감 그렇지만 궁금증과 도전의식이 함께 공존하는 것처럼 이 색은 단지 좋아하는 것을 넘어 공포나 끈덕진 의지의 표식이기도하다.” (조은필 작가노트 중에서)

    조은필 작가의 ‘블루’에 대한 집착과 강박의 단초가 되는 유년시절의 개인적 이야기는 그녀의 작업을 이해하는 시작이 된다. 그녀의 개인사에서 보면 ‘블루’는 내밀한 개인의 심리적 결핍에 대한 ‘보상의 色’이었다. 세상의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데이터와는 무관하게 ‘블루’는 조은필 개인의 ‘심리적 기호’로서 ‘더 블루 (The Blue)’ 가 되었다. 나에게 그녀의 이러한 ‘블루’에 대한 집착과 강박적 증상은 역설적으로 조은필 개인의 끊임없는 ‘정체성’의 확인 그리고 ‘안정과 조화’에 대한 보다 우선적이고 절실했던 욕구의 분출로 여겨진다. 이러한 작가의 내밀한 ‘안정과 조화’에 대한 욕망은 ‘블루’라는 개인적 色(색)의 판타지로서 다양한 매체와 공간연출을 통해 표현되어왔다.

    ‘시간’을 통한 또 다른 접근

    데릭 저먼(Michael Derek Elworthy Jarman, English film director, 1942~1994)은 개인의 내밀한 사적영역의 서술에 있어 ‘영화’라고 하는 컨텍스트와 영상매체를 통해 개인적인 색의 철학과 그 미학의 형상화에 있어 자신만의 시각적 언어로 재형상화하고 있다. 데릭저먼 감독은 자신의 유작(遺作)이 된 자전적인 기록영화 에서 개인적인 기억과 흔적으로 가득한 시와 일기를 나레이션으로 흐르게 하고 80여분의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화면을 일관되게 ‘불투명한 블루’빛의 스크린으로 연출하고 있다. 관객을 당황스럽게 하는 이러한 블루스크린의 불투명한 연출방식은 바로 데릭 저먼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투명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자신 스스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나’라는 실존에 대한 역설적 방식의 연출방식이다. 이러한 데릭 저먼감독의 영상매체를 통한 연출방식은 감독 자신의 내밀한 개인사를 강렬한 시각적 기호로서 형상화 하는데에는 탁월한 효과가 있었으나 개인적 서술영역의 객관화 내지는 타자로 하여금 반응을 요구하고 공유할 수 있는 ‘여유’의 배려는 생각할수 없다.

    조은필 작가의 이번 킴스아트필드 미술관의 <형(形)으로의 회귀>전에는 이전의 ‘블루’라고 하는 작가 개인심리사의 중요한 시각적 기호가 다른 방식으로 연출되고 있다. 이전의 ‘블루’가 작가 자신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가지고 주(主, Main)가 되는 공간의 연출요소로서 등장했다고 하면 이번 전시에서 ‘블루’는 그 강력했던 가시적 요소를 줄이고 ‘시간’이라는 중요한 요인을 통해 변화된 결과들을 가시적 형태로 ‘회귀’시킴으로써 ‘시간의 흐름’이라는 또 다른 테마를 등장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시간’이라고 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작가의 중요한 시각적 기호인 ‘블루’와 함께 다양한 ‘오브제’를 통해 시각적인 형태로 회귀되고 있다고도 말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형(形)으로의 회귀- 기둥〉(2019)은 이러한 작가의 의도를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관객은 기둥 어딘가에 보이지 않게 설치해 놓은 링거병에서 반복적이고 일정하게 물방울이 떨어지면 고요했던 전시장에서는 잔잔하게 시간 순으로 울려 퍼지는 그 소리를 연쇄적인 반응으로서 물방울의 파장의 形(형)을 수조를 통해 청각적・시각적 형태로 인지하게 된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사건은 이미 몇 초전의 일어난 일이지만 그 물방울로 인해서 보여지는 파장의 연속은 관객으로 하여금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개념을 유추해서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고대 그리이스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의 일부로서 이오니아 양식(Ionic order) 기둥과 코린트 양식(Corinthin order) 기둥이 재현되어 같은공간에서 연출되고 있는데 이러한 고대 기둥의 재현은 연쇄적인 반응, 청각적・시각적 형태의 반응 현상과 함께 다양하게 확장된 ‘시간’의 개념을 시각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이번 조은필의 전시는 마치 영화의 쇼트필름들을 공간에 펼쳐서 감상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전의 전시가 개인적 판타지의 ‘단면들’, ‘필름컷’이라고 한다면 이번 전시는 ‘고요한 나레이션’과 함께 상영되는 짧은 단편영화들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이전에 ‘블루’로 일관했던 강렬한 시각적 연출이 관객으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았던 작가의 강박적 호소에 대한 설득의 강요를 받는 공간이었다고 하면 이번 킴스아트필드 미술관의 <형(形)으로의 회귀>전은 오히려 한걸음 멈춰서서 작품에 몰입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부여된 ‘묵상’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변화된 작가의 작품세계를 보면서, 막혀있는 동굴이 아닌 그 끝에 빛을 보고 걸어가는 또 다른 순례길로 접어든 여유있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죽은 나무의 뿌리와 그 그림자를 프로젝트 영상을 통해 자연스럽게 연출한 〈형(形)으로의 회귀-뿌리〉(2019), 또 다른 ‘블루’의 색채로 염색한 모스(moss)와 액자프레임이라는 오브제를 다양하게 연출한 〈형(形)으로의 회귀- 프레임1〉(2019), 〈형(形)으로의 회귀- 프레임2〉(2019)의 작품에 이러한 작가의 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인상적인 작업은 조은필 작가가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을 때 우연히 접하게 된 마조렐 블루(Majorelle blue)의 안료와 흰색 깃털로 아름답게 연출한 〈형(形)으로의 회귀- 가루〉(2019)이다. 마조렐 블루는 모로코에 위치한 마조렐 정원에서 유래된 색으로서, 정원을 건축한 사람인 자크 마조렐의 이름을 따 '마조렐 블루'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이브 생 로랑의 정원으로 더 유명하다. 온통 ‘블루’로 채색된 공간을 보면서 작가는 해방감과 충족감을 느끼고 그 안료를 꼭 한번은 작품에 사용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때의 염원했던 마음을 15여년이 지나서 작품을 통해 성취했으니 이 또한 작가의 개인적인 ‘블루’의 심리사를 그대로 담은 작품일 것이다. 인터렉티브를 위한 설치는 오히려 아날로그적 감성을 불러 일으키는 조금은 미숙한 방법으로 설치되었다. 부드러운 깃털이 마조렐 블루 안료를 반복적으로 천천히 쓸어갈때의 흔적은 또 다른 작가의 개인적 블루에 대한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20세기 후반 대표적인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예술에 대한 그의 핵심적인 정신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또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딴 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에 관해서 알 수 있다. 예술이 없었다면 그 다른 세계의 풍경은 달나라의 풍경만큼이나 영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술 덕분에 우리는 하나의 세계, 즉 자신의 세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증식하는 것을 보게 된다.”

    임수미, 『‘시간’을 통한 形으로의 回歸(회귀)』, 도록 서문, 《조은필 개인전 - KAF2 오늘의 작가전 '형(形)으로의 회귀'》 (2019. 10.4 ㅡ11.12 부산 킴스아트필드 미술관)

  • 익숨함, 그 파랑보다 낯선 -- 황석권 ( 월간미술 편집장 )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나 대상을 마주할 경우 흔히 ‘낯선’이라는 수식어가 동원된다. 그로인한 자극은 때로는 미적(美的) 경험과 연결되는데 이는 익히 알려졌듯 서구 초현실주의 미술가들이 주창한 표현방법 혹은 작품의 구현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법칙이나 질서에 도전하는 비상식성, 익숙하지 않은 상황 혹은 익숙한 상황에서 발견하는 낯섦, 도저히 조화를 이룰 것 같지 않을 이질성 짙은 사물들의 조합, 인식하지 못했던 대상들의 발견, 비문법체계의 도입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요소를 담은 작업을 만나면 차원이 다른 세계 혹은 그럴 듯한 개연성을 상상하는 행위와 별개로 ‘뻔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과 같을 내일이 펼쳐지는 삶에서 세상 무엇이 이런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까?
    조은필의 작업은 위에서 열거한 다양한 비현실적 상황과 조우하게끔 이끈다. 광기와 우울을 함유하고 있다는 보랏빛 도는 ‘울트라 마린 블루’의 압도적 컬러로 덧입혀져 본래의 형상과 기능을 상실한 대상과 공간을 구현하는 작가 특유의 작업방식은 여지없이 관객의 시신경을 강렬히 자극한다.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철저히 작가의 단일한 의지로 채워진 온통 파란 공간과 대상은 그간 작가 작품세계를 구축했던 주된 축이다.
    비단 조은필의 작업에 줄곧 등장하는 파란색뿐만 아니라 특정한 색이 갖는 의미는 어느 정도 고정되고 상투적인 상징의 체계 내에서 해석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색’은 개개인마다 다른 심적 상태나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공동체 내에서 역사적으로 공인되어 구성원에게 비슷한 의미로 전달된다. 조은필의 파란색도 예외는 아니다. 이를테면 인간이 태어나 가장 많이 감지하는 색 중 하나인 파랑은 그 자체로 자연의 색이다. 하늘, 바다, 그리고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지구인이라면 발을 딛고 있는 지구 그 자체가 우주에서 파랗게 빛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또한 가장 사회성 짙은 색이다.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특정 성(性)을 지칭하여 그 자체로 아이콘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란색만큼 고정된 색의 개념과 의미를 벗어나기 쉽지 않아 그 인식에 있어 이른바 ‘세상의 질서’에 복종을 요구받는 색도 없다.
    그런데 작가는 왜 이렇게 견고하여 작가 개인 의도를 강력히 피력하기 힘든 파란색을 작업에 도입했던 것일까? 그것도 전폭적으로, 빈틈없이, 단일하게. 이에 대해 그는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면서 줄곧 놓지 않았던 파란색은 자신의 최고(最古) 오래된 기억 이전부터 사로잡힌 ‘강박’에 기인했노라 고백한다.

    “나의 블루에 대한 집착은 강박에 가깝다. 내 공간을 그 색으로 메우고 싶다.”(작가노트, 2018)

    도대체 기억조차 할 수 없이 오래된 그의 파랑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왜 지금도 유효한 것일까? 이에 대한 작가의 대답은 “나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허탈하기 까지 했던 그 대답은 오히려 ‘그게 그냥 나예요’라고 말하는 독백으로 들렸다.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이 쌓여 담담한 인생이 되듯, 조은필에게 파랑은 그냥 밥이고 옷이며 들이 마시고 내쉬는 공기와 같이 언제나 있던 것이었다. 더불어 기억조차 할 수 없어 그 이유를 찾을 길 없는 의식의 최저점에 똬리를 틀고 있는 파랑의 근원이 지금도 현실의 작업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바, 그 위치를 알기 전에는 버릴 수도, 극복할 수조차 없다. 그가 구축했던 파란 대상과 공간은 그래서 그 자체로 작가의 자아다. 그러니 조은필이라는 존재는 항상 스스로를 비일상적 존재로 전환하여 비현실적 공간을 점유하고자 하는 욕망 그 자체로 환원하고자 갈구하고 있다.
    그런데 조은필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형태의 견고함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일하고 완성된 형태의 어떤 작업에서도 그것은 완벽하게 완성되어 그 자체로 닫힌 형태라는 인상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는 <블루 너머의 블루>(2012), <일렁이는 궁전>(2011) 그리고 <일렁이는 브릿지>(2011)처럼 물렁하고 부드럽고 언제든지 구부러질 수 있으며 자신의 경도로는 도저히 기립할 수 없는 연체성이 도드라진다. 뼈대에 해당하는 내부 구조물 없이는 구축될 수 없는 형태이지만 그것들은 공간을 꿋꿋이 점하고 심지어 확장하고 있다. 작업 방식이 ‘뜨개질’이라서일까? 부드러운 재료들이 만나는 지점에는 필히 행위의 흔적인 ‘시간’의 증거가 남아 있으며 작가는 이를 시각화하고 있다. 시간의 그물망으로 공간을 점유하며 비물질적 요소를 감지할 수 있는 촉각적 대상으로 풀어내고 있다.
    대상을 색으로 덮는 방식의 활용과 비물질적 요소의 교차와 더불어 조은필 작업을 더욱 비현실적으로 만드는 기제는 법칙을 거스르는 연출방식이다. 전시장에서 만나는 나무는 온통 자연 법칙의 대척점에 위치한다. 누워있고, 부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나무는 땅에 뿌리를 박고 드리우며 그 줄기는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것이어‘만’ 한다. 나무가 점유할 수 있는 땅과 지향해야할 지점이 명확하다. 그런데 공중에 매달려 있는 푸른 나무는 그 잔뿌리까지 땅이 아닌 공기 중에 존재한다.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대상의 존재방식과 상황에서 작업은 더 이상 현실의 그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연에 존재했으나 작가의 손길을 거치면서 세상에 없던 새로운 공간에 존재하는 가상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조은필의 누워있는 나무는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당연히 존재하지 않을 그곳에 있다하여 그것은 소멸한 것일까? 아니 그것은 다른 물리 법칙이 작동하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이미 우리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들어왔다. 그 통로는 벽면 설치작업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출입문 역할을 하고 있는데 들어가야할 곳임과 동시에 나아가야할 곳이 된다. 그래서 조은필의 푸른 나무는 일종의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환기해야하는 사실이 있다. 그 나뭇가지는 가까운 장소에서 누구나 쉽게, 그래서 오히려 눈여겨 보지 않는,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보잘 것 없는 대상이라는 점이다.

    “작품 속 나무들은 마을을 지키는 나무도 큰 신을 모시는 나무도 아니다. 그렇다고 100년, 1000년 된 나무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 나무들이 지내온 시간(삶), 죽음 그리고 그들의 존재 자체를 그냥 떠나보내기보다(…) 그들의 지난 삶을 되돌리지는 못해도 작업을 통해 그것들을 기록하고 싶은 의지가 생겼다.”(작가노트)

    실제로 작가는 특별한 히스토리를 품은 대상을 억척스러운 노력을 기울여 발견한 것이 아닌 ‘주은’ 획들물임을 밝히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 나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도저히 자랄 수 없는 토양에 뿌리내린 이유로 도태되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던 운명이었다. 대상의 아우라를 발할 이유였다면 작가는 나무에 얽힌 사연을 찾아나섰을 것이다. 그 사연에 대한 일종의 다큐멘터리를 작업의 모티프나 주제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선택은 그 소멸한 생명을 통해 정지되고 고착화된 공간의 구성이다. 이는 작가가 드러내고 싶은 바가 비시각적인 시간의 흐름으로 전환의 국면을 맞이했다는 말이 된다.
    한정된 공간보다 시간의 흐름은 특별한 방향성을 지니지 않은 채 그저 면면히 흐르는 성질을 지녔기에 물리적 한계를 넘는다.

    “(…) 한정되지 않는 무한한 것과 나무들의 죽음(시간)을 초월하는 것이 가능하게 해서 시간이 정지된 공간, 시공간의 추월에 대한 가정을 시각화 해본다.”(작가노트, 공간에서 시간으로)

    그러나 여기에서 조은필 작업을 보는 당연한 방식을 극복하고자 하는 묘한 오기가 생긴다. 사실 조은필의 작업을 보는 굳어진 시선을 걷어내는 방법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집착과 그로인한 선입견을 버리는 일이다. 이미 고정된 세상의 질서에 대항하는 행위로 이는 작가의 작업방식과 마주보며 평행하다. 먼저 그간 조은필 작업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았던, 그리고 어쩌면 가장 지배적인 요소였던 '파랑'을 애써 외면하는 행위를 취해보고자 한다.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파랑에 눈이 멀어 대상의 외연에만 집중하는 우를 범하지 않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랑을 외면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익숙한 듯 받아들여보고자 한다. 이는 작가도 이번 전시를 통해 파랑을 사용하는 데 있어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랬다. 보잘 것 없이 도태된 나무였지만 자연에서 취한 나무의 겉면에 새겨진 자연스러운 흔적은 그동안 자신의 작업 전반을 지배했던 파랑을 덧칠하는 행위로 극복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작가의 고백 앞에서 앞서 파랑에 굴복당하지 말자는 조은필 작업을 감상하는 새로운 지침은 이내 폐기해야 하는 듯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극복의 대상에서 수용의 대상으로, 물리쳐야 할 투쟁의 대상에서 오히려 익숙해져야할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은필의 작업에 대한 인식은 순환의 논리로 귀결되는 것일까? 아니, 그것은 다른 차원으로 도약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같은 축에 놓여있지 않고 비틀어져 있거나 다른 축으로 옮겨진 듯하다.
    여전히 조은필의 작업은 전시장에서 낯설다. 그러나 그 낯선 대상과 공간이 조금은 익숙해질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 ‘익숙함’을 다시 ‘낯섦’으로 바꿀 당혹스러운 상황과 대상을 준비하고 있다.

  • 색이 대신해 온 것들 -- 안소연 ( 미술비평가 )

    프로젝트스페이스사루비아다방 SO.S

    어떤 형상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 중에서, 그 정보가 지각되는 순서는 누구에게나 동일하지 않아 논리를 예측하기는 어렵다. 형상과 풍경과 세계를 바라볼 때, 무엇이 먼저 보이는가는 흔히 그 반대편의 자리에 서서 지각하는 눈과 머리와 몸과 마음에 따라 서로 다른 답들에 닿게 된다. 그 사이의 비어있는 거리만큼이나 수많은 지각의 경로들이 열려있고 저마다 다른 속도를 가지게 된다. 본다는 것은, 본 것에 대해 안다는 것은, 그래서 그 경험을 소유한다는 것은, 지극한 차이를 각자의 내부에 그려내는 “불확실한 시각 주체”에 의해 연쇄적으로 지속되는 시지각의 상이한 위상을 환기시킨다. 그토록 불확실한 것임을 알면서도 내가 본 것에 대해 어떤 이미지로 지각의 차원에 붙들어두려는 강박은, 어쩌면 그 대상과의 관계를 “확실함”으로 실체화하려는 시각 주체의 페티시적인 욕망에 가까이 닿아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조은필의 경우, 그간의 작업에서 이러한 사유의 단초를 예외 없이 드러내오곤 했는데 필히 그가 붙들어 왔던 색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말 그대로, 그는 무의식적 충동에 가까울 정도로 사물의 표면을 파란색으로 일제히 뒤덮고 그 단색의 형상이 시지각을 압도해 버리는 스펙터클한 상황을 극단적으로 반복해 왔다. 조은필은 특히 전시공간으로 특정된 일상의 실제 공간에 파란색을 서슴없이 가져다 와서 형상과 배경을 색으로 크게 대비시킴으로써 일체의 시지각적 분산을 차단이라도 하려는 듯 비현실적인 선명함을 강조했다. 이때, 형상과 배경은 일반적인 공간 구성의 논리를 벗어나 파란색과 파란색이 아닌 것으로 새롭게 구획되어 공간이 재배열되는 착시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

    이를테면, 특정 장소의 건축적 조건에 개입하여 파란색의 물질 혹은 파란색의 형상을 마술처럼 새롭게 배치해두었던 (2016), (2015), (2011) 등을 보면, 여기서 색은 3차원의 공간이 지니고 있던 합리적이고 관습적인 질서를 전복시켜 공간에 대한 일체의 시각적 위상-내부와 외부, 크고 작음, 중력과 낙하, 원근감과 소실점 등-을 의심케 한다. 한편, 형상과 배경의 구분을 파란색으로 남김없이 지워버린 (2005)의 2차원적 폐쇄성은 지속적으로 임의의 사물들로 옮겨 붙어, <내방의 존재하는 사물들과는 다른 것>(2018), (2017), (2015)로 이어져왔다. 이러한 과정은 사물 그 자체를 단일한 색의 표면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사물 고유의 특성을 모두 그 표면 아래 숨긴 채 오직 형태가 지닌 총체로서의 2차원적 윤곽(정면성)만을 부각시켰다.

    그렇다면, 파란색을 고집하며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그가 지속해 왔던 일련의 작업들에서 과연 “색”이 대신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색을 통해 임의의 대상과 관계 맺으며 실체화하려 했던 강박은 무엇이었을까? 조은필은 주체가 겪(었)을 외부세계에 대한 혼란스러운 시지각적 불확실성을 전제로 하면서, 일련의 불완전한 시지각 체계를 뚫고 (불가능한) 형태의 윤곽만을 온전하게 검출해낼 일종의 시약으로서 파란색 물감을 채택해 온 것으로 보인다. 선명하게 형태를 과시하는 사물 혹은 세계의 모습에서, 그가 보고자 했던 유일한 것은 총체적인 윤곽으로서의 “형태”였던 것 같다. 이파리부터 잔뿌리까지 온통 파란색으로 덮어버린 나무의 현전은, 그것이 나무라기보다 나무의 형태로 인식되기를 요청하는 작가의 속내를 드러낸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외부세계와 자신의 물건을 구분 짓던 파란색에 대한 유년기의 집착을 훗날 조각가로서 배경과 구분되는 조각의 표면적 윤곽에 집착해야 했던 입장들로 전이시켜 그 접점을 극대화 방식으로 전개된 것이라 가늠해 볼 수도 있을 테다. 또한, 조은필에게서 “색”은 사물의 질감 혹은 물성을 초월/초과하여 지각되는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다양한 일상의 물건들부터 이끼나 나무 같은 자연물에 이르기까지, 그는 그 형태를 이루고 있는 물질의 정체성이 가늠되기 이전에 이미 과도한 파란색이 시지각적 정보로 충만하게 전달되는 효과를 내세워왔다. 그것은 마치 조각에서 형태를 재현하되 그 질감은 조각 재료의 물성에 충실했던 조각적 관습을 전유해, 다시 조각적 제스처를 부분적으로 따름으로써 그가 채택한 파란색을 조각적 재현의 도구로 삼는다는 인상을 남긴다.

    그러한 작업의 오랜 연속에서, 이번 전시 SO.S(2019)는 무엇보다 기존 작업에 대한 일종의 각주 같은 성격이 강하면서, 그로 인해 하나의 큰 전환점을 맞이할 수도 있는 현재의 임박한 상황을 환기시킨다. 그동안의 “색”에 대한 집착은 스스로 맞닥뜨린 “빛”의 조건에 의해 무효화됨으로써, 색이 대신 했던 (배경과 구분되는) 형태의 윤곽과 그것을 이루는 실제적인 물성에 대한 대체 효과 등을 빛에 의해 재매개하거나 재구조화하는 태도를 내비친다. 결국 빛에 의해 갱신되는 주체의 시지각적 능력은 불확실함의 토대 위에서 허상일지 모르는 실체와의 끝없는 견줌을 시도하게 된다. 유독 공간과 빛의 접점이 시지각적 실체로 연결되는 SO.S에서도, 그는 파란색이 담당했던 형태의 삼차원적 윤곽을 의식하면서 실재하지 않으나 삼차원에 현전하게 되는 한시적인 윤곽선을 강조하며 그 아이러니를 붙들고 있다.

  • 욕망하는 블루(blue)의 현상학적 지각 -- 김성호 ( 미술평론가 )

    I. 블루의 마술적 판타지
    작가 조은필은 초기작의 코발트블루(cobalt blue)로부터 최근의 울트라마린블루(ultramarine blue)에 이르기까지 블루로 대변되는 파란색에 대한 개인적 취향과 기호(嗜好)를 강박적으로 작품 속에 드러내 왔다. 아래, 그녀의 세 언술은 이러한 작품 세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유년기 시절의 감성에서 시작된 블루에 대한 막연한 욕구는 작가로서 작업을 하게 되면서부터 나 스스로를 나타내는 정체성의 색이 되고, ‘집착’이 되었다.” (2016, 작가노트)
    “나의 블루에 대한 집착은 강박에 가깝다. 내 공간을 그 색으로 메우고 싶다.” (2018. 작가노트)
    “나의 작업은 블루를 주된 조형 요소로 하여 일상적 소재를 초현실적이고 비일상적인 공간으로 전환하는 설치 작업이다.” (2016, 작가노트)

    즉, 작가의 작업은 ‘블루에 대한 체험적 감성의 출발 - 블루에 대한 집착 - 블루에 대한 강박 - 블루를 통한 공간 점유의 과정 - 블루를 통한 일상적 소재의 비일상적 공간으로의 전환의 결과’라는 단계별 진화로 펼쳐져 온 셈이다. 여기서 블루는 실재를 감추는 가상의 색이자 마술적(magical) 이미지이며, 일상의 오브제로부터 초현실적이고 비일상적인 미술품 더 나아가 판타지의 공간으로 위상을 변주시키는 마법의 매개체로 기능한다. 작가의 블루는 마술적 효과를 견인하는 주요 무기이다. 마술이 속임수의 기술을 통해서 실재를 위장하고 가상의 이미지를 드러내면서 판타지를 선사하는 것처럼, 그녀의 작업은 사물의 표면을 블루로 덮어 실재를 은폐, 위장하고 블루가 표상하는 가상의 이미지로 판타지의 세계를 드러낸다. 보라! 재봉틀, 화분, 의자, 조화, 지구본, 새장 등 푸른색으로 뒤덮인 오브제가 푸른 방 안에 가득한 공간 설치 작품인 〈Mad Blue World〉(2006)에서 각 오브제들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고유의 무늬나 텍스트를 지우고 블루 속에 숨겨진 채 욕망의 세계를 확장한다. 푸른색 문과 담벼락을 타고 자라난 푸른 꽃들이 가득한 〈Blue Popcorn〉(2006)이나 그것들이 마치 연극 무대 장치처럼 설치된 작품 또한 블루를 통해 일상의 오브제로부터 비일상의 미술의 세계로 자신의 몸을 확장한다. 의자, 장롱, 책상 등 폐기된 가구와 온갖 잡동사니 위에 이끼를 입히고 블루로 뒤덮은 거대한 조각적 구조물을 설치한 작품, 〈Blue moss- From reality to illusion〉(2017)은 또 어떠한가? 이것은 작품 제명처럼 ‘일상의 오브제’라는 실재를 가리고 ‘블루가 견인하는 환영의 미술’로 변주된다. 그녀의 개인전, 《Magical Approach》(노블레스, 콜렉션, 2017)에서 폐가구와 인공의 화분 등에 푸른색을 입힌 작품들 역시 이러한 ‘마술적 판타지’는 여실히 드러난다. 생각해 보자. 마술은 현실계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속임수 등을 통해서 가상의 이미지로 실현하지만, 그 이미지란 결코 실재가 아니다. 마술의 세계에서 실재는 대부분 은폐되어 있으나, 마술의 최종 단계에서 그 은폐의 마법을 벗고 현실 속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이 때 관객은 환호한다. 그것이 마술이 의도하는 마지막 단계이다. 조은필의 작업은 어떠한가? 작가는 모든 재료를 '청색화(buleing)'하는 방식으로 다종다양의 사물을 균질화함으로써 일상의 이미지를 비일상의 미술적 이미지로 전환한다. 이러한 그녀의 작업에서도 실재는 마법의 블루 밑에서 은폐된 채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작업이 마술과 다른 것은, 자신이 펼치는 마법의 이미지를 끝내 벗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무한히 확장시켜 나가면서, 현실과 마술의 이미지를 한꺼번에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녀의 작업은 모든 것을 뒤덮은 가상의 블루 이미지로 가시화되지만, 이내 관객으로 하여금 블루의 마법에 걸린 사물의 실재가 무엇인지를 다시 살펴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의 ‘블루잉’이라고 하는 단순한 행위가 초래하는 ‘블루의 마술적 판타지’가 지닌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만드는 것이다.

    II. 블루의 강박적 욕망으로부터
    작가 조은필에게 있어서, ‘블루’는 유년기부터 좋아하는 색으로 소유와 집착의 대상이었다. 블루에 대한 강박적 욕망이 훗날 그녀의 예술의 장에서 ‘가장 자기다운 예술’을 펼치기 위한 강력한 무기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즉, 작가 조은필에게서 ‘블루’란 “판타지, 욕망의 끝을 보여주기 위한 가장 적합한 수단이자 방편”(2018, 인터뷰)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녀의 “블루에 대한 집착은 작업 속에서 전체의 이미지를 이끌고 가는 ‘강박’의 코드인 동시에, 일탈의 한 변주”(2016, 작가노트)라 할 것이다. 그녀의 ‘블루에 대한 강박적 욕망’은 푸른색이 있는 사물을 모으는 방식으로부터 점차 여러 사물을 자신의 블루로 빈틈없이 덮는 확장의 방식으로 변모해 왔다. 즉 ‘동색(同色)의 푸른 오브제의 채집과 병치’의 방식으로부터 ‘이형이색(異形異色)의 오브제 채집과 블루를 덮은 해체적 설치’의 방식으로 자신의 작업을 전개시켜 나간 것이다. 그것이 ‘발견된 오브제’인지 ‘만들어진 오브제’인지는 주요하지 않다. 블루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매개체’로서의 의미가 주요할 따름이다. 예를 들어, 작가 조은필은 루이스(C. S. Lewis)의 소설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1950-56)에서 현실과 판타지의 세계를 연결하는 ‘옷장’과 같은 매개체로서의 존재적 의미를 자신의 2017년 개인전에 등장한 가구 설치 작업에 부여한다. 즉 블루와 마찬가지로, 이 가구 오브제들이 관객들을 일상의 공간으로부터 자신의 예술 공간으로 이동하게 만드는 매개적 존재가 되길 기대한 것이다. 이처럼 작가 조은필은 매개체로서의 의미를 펼칠 수 있는 재료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자신의 작업 안으로 끌어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블루가 칠해지는 다종다기한 일상의 오브제로부터 원자재, 부품, 가구와 같은 산업재는 물론이고, 조화, 인조 이끼, 건조 이끼, 인조 나무, 그리고 최근의 자연목에 이르기까지 그 진폭은 넓었다. 한편, 작가 조은필에게 있어, 이러한 블루의 확장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도입된 다양한 조형의 개입은 그녀의 블루를 ‘물리적 공간의 확장’으로부터 ‘심리적 공간의 확장’으로 변주하게 만들기도 한다. 즉 강박적인 블루의 욕망을 일탈시켜 다수의 욕망의 지점들을 만들면서 변주를 시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리즈 작품 〈Bring the space〉(2016)의 경우에서처럼, 천장, 바닥, 벽 등에 설치된 무수한 작은 깃털 형상과 더불어 작품 〈푸른 깃털〉(2015-16)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 미술관에서 선보인 소수의 거대한 깃털은 물리적 공간 너머 심리적 공간을 넘나든다. 한편, 작품 〈Dye the space blue〉(2015)이나 〈푸른 새들〉(2015)의 경우에처럼 조형물 또는 새와 같은 동물 형상들은 푸른색을 입은 채, 푸른색 아닌 공간을 향하여 자라며 시각적 확장과 점유를 시도한다. 한편, 우울, 평정, 희망의 사이에서 관객의 심리적 공간마저 확장시킨다. 여기에 덧붙여 작품 〈Blue beyond the blueⅡ〉(2016)의 경우에서처럼, 조각의 질료, 회화의 지지대와 같은 역할을 견지하는 ‘털실’과 같은 소재는 작가의 ‘블루에 대한 강박적 욕망’을 ‘씨줄과 날줄’, ‘추상과 구상’, ‘물리적 공간과 심리적 공간’ 사이에서 다양하게 확장하고 변주시킨다.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인지 골과 마루가 겹쳐진 산인지 에너지 가득한 추상의 형상인지 확인할 길 없는, 털실로 된 ‘거대한 설치물’은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 또한 블루의 욕망을 극대화시키는 물감에 대한 연구는 또 어떠한가? 그녀는 자신의 완벽한 블루를 찾기 위해, ‘털실 작업’의 경우 광기의 의미를 담고 있는 보라색을 더 강화시키기 위해 공장에서 특별 염색을 시도한다거나, 인조 이끼 작업의 경우, 염색약으로 물들인 후, 다시 페인트로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블루의 도색에 대한 여러 실험을 거쳤다. 가히 블루의 욕망을 극대화하고 확장하는 실험이라 하겠다.

    III. 블루의 현상학적 지각으로
    푸른 자연목을 설치한 이번 개인전, 《내 방의 존재하는 사물들과는 다른 것》에서도 작가 조은필의 블루에 대한 ‘강박적 욕망’과 ‘심리적 확장’ 그리고 그것이 야기한 ‘마술적 효과’는 정도가 다를 뿐, 여전히 나타난다. 이번 전시에서, 전시장 천장에 매달린 묵직한 자연목들의 피부 위에 뒤덮인 파란색의 물감은 나무의 자연색을 은폐하고 자연물의 존재적 위상마저 탈각해 내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것이 어디선가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생존했었던 자연의 생명체였음을 말이다. 이처럼, 너무도 생생한 자연물의 유기적 형태와 나무의 원형적 이미지는 우리의 시각 앞에서 끝내 은폐되지 않는다. 작가 조은필은 이번 전시에서 ‘확장하는 블루의 욕망’이 맞닥뜨린 어떠한 ‘미끄러짐’을 경험하면서, “자연에 굴복하고 말았다”고 고백한다. 그녀의 언술은 이번 개인전에 그녀가 내리는 결론이자 우리가 그녀의 작품 세계를 읽는 새로운 출발점이다. 일견 패배감 가득한 이 말이, 블루로 확장하는 그녀의 창작 세계가 도달한 막다른 골목에서 만난 하나의 ‘변곡점’ 혹은 ‘터닝 포인트’로서 새롭게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필자는 그것을 ‘블루의(에 대한) 현상학적 지각’으로 정의한다. 이 말은 필자의 새로운 작명이기보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의 저작인 『지각의 현상학(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1945)으로부터 가져와 ‘현상학적 관점의 지각’을 강조하기 위해 변형한 말이다. 여기서 현상(phénomène)이란, “인간이 알아서 깨달을 수 있는, 사물의 모양이나 상태”라는 사전적 정의처럼,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 모든 활동의 총체’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온도, 통증, 소리, 색, 크기와 같은 인간의 오감으로 수용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모든 현상은 인간 주체의 주관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천둥소리는 ‘대기 중의 방전에 따른 진동에 의해 생긴 음파’라는 객관적 실재이지만, 수용자의 귀청에 전달될 때 비로소 현상이라고 할 수 있듯이, 조은필의 블루 역시 ‘빛의 반사에 의해 나타난 물리적 결과’이지만, ‘빛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관객의 감각 작용’이 발생할 때 비로소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메를로 퐁티의 철학에서 현상이란 객관과 주관과 통합적 결과인 셈이다. 조은필의 작업이 창출하는 ‘블루’라는 ‘(색의) 현상’은, 오늘날 의미에서의 현상학의 출발을 알린 후설(E. Husserl)의 철학적 언어로 말하면,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ät) 안에서’ 즉 관객의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대로 존재한다. 따라서 일상의 오브제를 블루라는 단일색으로 뒤덮어 비일상적인 모습으로 만든 그녀의 마술적 이미지는, 관객의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에 따라 ‘숭고/공포의 블루’로, ‘희망/우울의 상징’으로 혹자는 ‘미술의 은유/기호’로 또 다른 이는 ‘낯선/무의미한 판타지’로 각기 달리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목을 블루로 뒤덮은 설치 작품을 선보인 이번 전시는, 이러한 관객의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을 고려하기 이전에 이미 작가 조은필에게 있어 심각한 하나의 도전으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작가 조은필에게 있어, 깊은 위안과 강력한 충족의 도구였던 ‘블루’가 더 이상의 ‘마술적 판타지의 실행’이라는 추동력을 잃고 침잠의 나락으로 작가를 밀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블루’로 자신(만)의 미술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작가 조은필의 그간의 강력한 의지와 기대가 ‘생명력으로 가득한 자연물’을 만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허물어진 셈이다. 올해의 개인전은 이 사건의 핵심이자 중심이다. 작가 조은필은 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언급하는 '지각(perception)'의 방식으로 이 사건을 받아들인다. 지각은 ‘현상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 ‘의식의 지향성’과 같은 의미의 다른 말로, ‘살(chair)’이라는 이름의 ‘삶의 체험이 축적된 몸'으로 받아들이는 총체적인 활동이다. 그녀는 ‘블루의 강박적 욕망’이 만드는 강력한 시각적 효과조차 자연물 앞에서는 너무나 유약한 존재가 되고 마는 현실을 살과 같은 총체적 몸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결국 그녀는 블루에 대한 자신의 의지가 ‘나무라는 생명 그 자체를 극복하기에 너무나 약한 것’임을 ‘현상학적 지각’의 차원에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번 전시가 ‘블루로 강하게 만들었던 자신의 방과 그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과는 다른 것’임을 선언한다. 《내 방의 존재하는 사물들과는 다른 것》이라는 이번 개인전의 전시명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IV. 에필로그
    작가 조은필은 이번 개인전을 자신의 작업에서 터닝 포인트 혹은 변곡점으로 맞이한다. ‘블루의 강박적 욕망’으로부터 ‘블루의 마술적 판타지’를 창출하던 그간의 작업들로부터 성찰의 시간을 가지고 새로운 도약을 위한 점검의 장을 마련한 셈이다. 필자로서는 그녀의 이후의 작업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다. 다른 방향에서 블루의 마술적 판타지를 극대화시킬지, 아니면 숭고한 자연의 존재 앞에서 무력화된 블루를 소생시켜 자연과 동행하는 새로운 작품으로 전환시킬지, 혹은 블루가 아닌 다른 색의 개입을 견인하면서 변곡점에서의 새로운 출발을 작동시킬지 모를 일이다. 다만, 우리는 그녀의 작업에서 새롭게 엿보이는 ‘사물에 대한 현상학적 지각’의 철학적 방법론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를 해볼 수 있겠다. 먼저 그것은 과거에 종속되는 결과물인 '말해진 말'(parole parlée)로서가 아니라 현재적 미래를 살아 숨쉬는 '말하는 말'(parole parlante)로서 펼쳐질 것임은 물론이다. 나아가, 퐁티의 현상학에서 지각의 주체인 총체적 몸으로서의 ‘살’의 개념은 인간의 몸을 넘어서 모든 존재자의 총체적 몸으로 확장된다. 이제 작가 조은필의 작업에서 ‘블루’는 퐁티의 현상학에 나타난 ‘살’의 개념을 계승하고 확장한다. 그녀에게 ‘블루’는 일상 사물, 작가 그리고 관객 사이에서 매개의 삶을 부단히 살고 있는 ‘나의 살’이자 ‘세계의 살’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 블루(blue)의 엄습 -- 김영준 ( 부산 현대 미술관 학예사 )

    누구에게나 자신이 좋아하는 색이 있다. 색은 단순히 광학적 현상이 빚어낸 물리적인 시각 인지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수많은 상징과 서사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색채마다 기능이 있으며 다양한 효과를 생산해 낸다. 또 색채는 사람들의 심리작용에 직접적이고 민간하게 관여한다. 사람들마다 기호의 색이 있다. 그래서 색은 취향에 따라 선별되기도 한다. 특정 색채에의 집착이 과중되면 병적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증상의 표현에 따라 창의적이고 예술적 상상력이 부추겨지기도 한다.

    미술가들에게 색채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색은 그들에게 다양한 예술세계의 모티브로써, 또 그자체가 목적이자 결과로써 기능하기도 했다. 하지만 색 자체는 여전히 불안하다. 색은 감각해 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다양한 의미들과 접합해서 욕망하는 그 어떤 실체로 재생산되어야 완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슬픔이나 고독은 블루스 음악이 깔린 저채도의 날씨에 접합해 영화적 상상력과 같은 그림이 그려져야 완결되듯이 말이다. 깨끗함과 순결한 느낌은 왠지 모르게 하얗게 보이는 것 또한 그렇다.

    작가 조은필의 작품은 처음부터 블루라는 색채로만 구성되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이 특정 색감은 매우 신비적이다. 때로는 우아하고 비밀스러우며 정적이고 우울하다. 이러한 감성은 작가가 이 색상을 선택하고부터 이미 전제된 정서이다. 그 다음은 형태나 위치의 변이다. 어떤 때에는 구체적인 형상들이 그 블루의 색상을 띠고 나타났으며, 또 어떤 때에는 블루의 추상적인 형태만이 드리워지기도 했다. 그녀의 작품 효과는 바로 그녀의 미감 증상인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어떤 색채로 이루어진 특정 정서의 엄습이다. 그래서 매우 공격적이다. 그녀의 블루는 폭력을 가하는 형태로 다가오지 않고 서서히 물들이는 방식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점점 그것에 익숙하게 만든다. 그래서 더욱 암시적이고 예측불허하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눈길을 돌린다면 이내 실패하고 만다. 블루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은필의 작품에서 색채에 대한 언급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색채만이 그녀의 작품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주로 공간설치라는 방법으로 주도해가며 다양한 재료들을 혼합하여 어떤 형태들을 구축해 간다. 때로는 구체적인 형상들이 조형되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추상 작업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작업은 많은 부분 공간적 특성에 대입된다. 화이트 큐브 공간을 비롯해 전시장 공간이 아닌 실내외 공간에 적용된다. 다시 말하면 블루와 더불어 그때그때 주어진 공간이 바로 그녀의 작품 소재이다. 대부분의 공간 설치미술이 그렇지만 그녀의 작품은 정면을 향해 우리와 마주보는 구조의 작품이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녀의 작품 속에 있어야 하며 작품을 보기위해 발끝에서 머리 위까지 시선의 반경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를 에워 싼 그녀의 오브제나 매체들은 강렬하고 인상적인 고유색상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녀의 작업을 상기할 때 예측할 수 있는 여지들이 이것이다. 작가를 아는 사람들은 그녀를 상기하는 순간 블루의 작품을 연상할 정도로 블루는 그녀의 아이콘이 되었다.

    2016년도 한 해 동안 조은필의 블루는 ‘깃털’이었다. 다양한 크기의 깃털들이 공간에 흩날리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정지된 공간을 연출한다. 때문에 우리는 그 깃털들이 중력에 거의 저항을 받지 않은 상태를 목격할 수 있다.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깃털들로부터 시작해서 깃털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자태를 볼 수 있다.
    플라스틱 수지로 성형해낸 깃털들은 여지없이 블루로 채색되었다. 그리고 전시장 공간을 눈에 보이지 않은 끈으로 달아 메웠다. 보통 흔한 말로 공간 설치작품이다.
    사실 조은필의 작품이 주는 효과는 그 이전에도 비슷했다. 털실이나 뜨개천으로 만든 추상적 형태의 설치물도 그랬으며, 그물망으로 만든 작품도 그랬다. 어떤 특정 정서의 ‘엄습’은 추상적 형태일 때 더 효과적이었다. 그런데 ‘깃털의 엄습’은 얘기치 못한 공습이다. 이쯤에서 몇 가지 점검해야할 것이 있다. 왜 깃털인가? 그리고 그 깃털은 왜 상식을 초월한 스케일일까? 푸른 깃털이 전시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흩날리도록 장치해 놓았는가 하면 호수 수면에 안착하기 직전 찰나적 순간처럼 거대한 깃털이 설치되었다. 마치 중력을 무시한 채 말이다.

    우리가 아는 깃털은 새의 몸통으로부터 탈락된 것이며 아주 가벼운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조은필의 깃털은 어느 것을 봐도 새의 몸통을 유추할 수 없고 가벼워 보이지도 않는다. 이것은 자칫 제작상의 기술적 결함이나 미숙한 조형 때문일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청색의 육중하고 더없이 무거워 보이기까지 한 깃털은 기표(記標)이기보다는 기의(記意)가 되기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나는 원래 어떤 새에게서 떨어져 나온 깃털(처럼 연출된 것)’이 아니라 ‘그냥 나는 이렇게 생긴 그 무엇’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중세의 이콘(icon)화로 그려진 성인(聖人)들이 모습은 그림을 그리는 엄격한 화법 때문에 오히려 어느 누구도 지시하지 못하고 그 자체의 이미지가 되었던 것처럼 조은필의 깃털은 이콘으로서의 깃털이다. 이렇게 그것만으로 충실한 깃털은 블루가 가져다주는 직접적이면서 또 상징적인 정서의 효과(지금까지 필자가 ‘엄습’이라 했던)보다 새로운 국면을 제시한다. 호수 수면위에 안착하려는 거대한 깃털은 호수 풍경을 배경으로 매우 신비하고 동화 같은 서사를 연출한다. 그러니까 깃털의 효과는 가져다 놓음으로써 하나의 국면이 완결되는 효과를 더한다. 과거의 작품은 사실 모든 국면을 작가스스로가 기획하고 만들고 연출했다. 하지만 지금의 깃털은 곁들여 놓음으로써 새로운 정서환경을 만든다고 할까? 향긋한 찻잔에 허브 잎 하나를 띄워 차를 마시는 동안 좋은 기분을 감돌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이것이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인 것이다.

    처음부터 울트라 마린 블루(ultramarine blue)라는 강렬한 색채 모티브로 시작한 그녀의 작업 여정은 어쩌면 깃털에서 변화를 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 변화는 어쩌면 작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오랫동안 그의 작업과 작품을 지켜본 필자는 그녀의 작품이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에 대해 사뭇 기대와 염려가 없지 않았다. 그리고 시종 ‘블루’의 집착을 어떻게 종결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깃털은 일종의 변화의 연착륙이라 할지, 발전적 변화라 할지 모를 고무적인 새로운 가능성을 읽을 수 있었다. 이제 작가의 작품이 말해주는 거대한 서사적 스토리텔링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해 본다. 우선 최초 울트라 마린 블루로 시작한 작업들이 이제 서서히 다양한 블루의 색감으로 활용의 폭을 넓히고 있다는 점 역시 그렇다. 다양한 색채로 파생되지는 않지만 블루의 색감을 더욱 풍부하게 하려는 시도가 보인다. 거기다 ‘깃털’이라는 대상을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 ‘깃털’을 전시장 공간이나 또 다른 실내 공간 아니면 야외의 어떤 곳에서 목격하게 되면서 우리는 현실이 아닌 가상의 새로운 장면 속으로 흡수되어 갈 것이다. 이 ‘첨가’의 도입을 통해 새로운 국면에 대한 더욱 풍부한 정서로의 유도가 가능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조은필의 작업을 ‘블루의 엄습’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조은필의 블루’, 더 나아가 조은필의 미적 연출이 발휘할 수 있는 다양한 위상들을 얘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변화의 시점에서 앞으로의 작업에 기대되는 것이 이 때문이다.

  • Blooming blue -- 김영준 (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

    박물관 유물진열장에 놓인 청동검을 본 적이 있는가? 꼭 청동검이 아니어도 좋다. 고택(古宅)의 붉은 벽돌담을 타오르는 담쟁이 넝쿨이나 틈새에 낀 이끼 풀이 그렇다. 그 대상들에 경외감을 느끼는 것은 그것들이 지내온 시간과 공간에 대한 내막에 관련이 있다. 저항적인 시공간을 견뎌 왔다든가 때로는 황금의 시공간을 누려왔을 바로 그 스토리 말이다. 그 뿐 아니다. 그 고택이 고성(古城)이든 종교적인 성물(聖物)이든 건축물의 형태에 대한 찬미도 빠질 수 없다.
    보통의 경우가 그렇다. 그런데 하나 더 주목해야할 것이 있다. 바로 색감이다. 우리의 미감을 자극하는 것은 스토리텔링이나 미학적 형태감, 색감 등이 좌우한다.

    청동검 본연의 사용가치는 상실했을지언정 유물진열장에 안치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획득하게 되는 것에 주목한다. 우리의 감각을 넘어선 추상의 시간 선상에서 눈에 현현(顯現)되는 그 확고함의 경이로움은 제의(祭儀)적 효과를 만든다.
    과거 누군가가 전쟁터나 사냥터에서 사용했을, 아니면 신분을 상징했을 그 검에 우리는 숙연히 응시하고 경탄한다. 그 ‘목격’, 시각적 현현이라는 확고함에는 청동검이 지니는 고풍의 형태에 더해 조화된 색에 혐의가 있다. 검붉은 칼날에 청록의 녹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 보색 대비의 효과가 시선을 가로채는 것이다. 청동검의 산화(酸化)가 가져다준 결과를 보라. 그것은 어떠한 미적(美的) 이유도 목적도 없다. 붉은 벽돌에 푸른 담쟁이나 이끼 풀들 역시 그렇다. 고색창연함은 그 역사적 스토리를 넘어 조형감과 색감이 결정한다. 잘생긴 청자항아리에 시선과 마음을 뺏기는 그런 것 말이다. 청자항아리의 매력에 무슨 사설이 필요하겠는가? 이른바 예술에의 감성이라는 것의 이런 것이다. 그래서 작품은 단지 하나의 물적 존재가 아니라 의미의 복합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청동검과 청록의 관계처럼 붉은 벽돌담과 푸른 담쟁이나 이끼 풀의 관계에서 각각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색들이 밀치거나 접합하고 때로는 반응하고 소통하는 사이 우리는 배색의 놀라운 효과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목격한 것은 하나의 장치이며 연출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관찰자들의 시각을 배려한 비유적 효과의 예술작품이다. 작가 조은필은 회색 계통의 벽돌담을 가상해서 만들었고 벽돌 사이사이에 푸른색 이끼를 이식함으로써 어떤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시각적 장치를 마치 무대세트처럼 전시장 한쪽 벽면에 채웠다. 청동검이나 고택의 효과는 주로 보색대비 효과가 가져다주는 시각적 역동성이었다면 그녀의 작업은 그레이(grey)를 배경으로 하는 블루(blue)의 동시대비적 효과를 세련되게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 벽돌담은 고색창연한 느낌을 아이러닉하게 판타지(fantasy)에 결합시킨다. 그러니까 고성의 붉은색 벽돌 담벼락에 그린(green)의 이끼에는 ‘옛날에 이 고성은....’으로 시작하는 어떤 스토리에 접합하는 것처럼 그녀가 제작한 회색 벽돌에 블루의 이끼는 뭔가 알 수 없는 내막이 숨겨진, 그래서 환상적인 어떤 스토리와의 관련성을 상기시키게 한다. 하지만 그 스토리는 행간이나 여백에서 발생한다. 관람객이 누구나 자유롭게 상상해 지어낼 수 있는 그런 인공의 내막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작가 조은필의 작업은 우리가 생활하면서 빈번히 목격하는 경이로운 대상들을 미술작품으로 옮겨온 셈이다. 그래서 그녀의 작업은 스펙터클(spectacle)하다. 설치미술 일반이 대개 스펙터클하지만 그녀는 그 스펙터클 자체를 자신의 작업 중심에 놓는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작업이 있다. 앤티크한 고대 성전의 이미테이션 기둥 몇 개를 전시장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고정된 형태를 지니지 않은 채 기둥과 기둥사이의 천정과 바닥을 점유한다. 짙푸른 이 물건은 비구름처럼 몰려오는 것처럼, 아니면 바닥에 스믈스믈 흘러가는 용암의 느낌이 드는 것처럼 연출되었다. 이 역시 조형과 색이 예사롭지 않다. 성전의 기둥이라는 분명한 암시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 흐느적거리는 물체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이 동행 불가한 관계, 이 부조리한 접합과 사태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현실과 비현실의 동거를 보면서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마치 ~과 같은...’의 비유적 용법은 아직도 유효하다. 스펙터클한 관망을 넘어 초조하고 불안하며 불길하다.

    작가 조은필의 전시 <불루밍 블루(blooming blue)>에 대한 대략의 느낌이 이렇다. 그녀의 작업에서 색은 매우 중요하다. 정확하게 울트라 마린 블루를 주색조로 하는 청색일색이다. 이 색은 짙푸르고 보라(purple)의 기운을 한껏 가지고 있다. 그녀의 블루는 눈높이의 만만한 대상이 아니다. 관찰자가 서있는 공간을 엄습한다. 위아래 할 것 없이 사방을 블루로 채운다. 그녀의 작업은 타블로(tableau)라는 단위 형태를 극복한다. 마주보는 작품이 아니라 들어가야 하는 작품이라서 조형 성질은 공간 연출로 드러난다. 부조리한 관계를 설정하고 무대 세트처럼 연출하면서 ‘블루’라는 색가(色價)를 충분히 드러낸다.

    ‘불루밍 블루’라는 전시타이틀은 아마도 음운을 반복하여 획득할 수 있는 어감의 재미를 의도한 것 같다. 하지만 그 의미처럼 블루가 여기저기 피어나 만개해 있는 작업의 상태를 가장 잘 요약해주고 있는 구문이다. 분명 블루가 가지고 있는, 그리고 블루에서 느낄 수 있는 추상정서를 극명하게 맥락화시킨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발음 ‘블루 블루’의 연음은 마치 의태어처럼 작동한다. 뭉게 뭉게처럼 전시장의 사태가 마치 블루 블루한 것 같은 느낌인데 그 어감 뒤에 ‘블루가 피어나는’정도의 의미에 가 닿는다. 이 정도면 매력있는 발상이다. 그녀의 작업은 엄격한 알레고리를 가지고 있어 숨겨진 이야기를 말 한다든가 아니면 작품의 컨디션이 개념적이어서 맥락을 읽어야 한다든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추상화를 보는 것처럼 전적으로 감성의존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뭉게 뭉게 피어오르는 구름을 보면서 닮은 꼴 동물을 찾듯이 ‘불루밍 블루’의 느낌대로 스펙터클에 가 닿는다. 이 환영(illusion)적 효과는 지속성이 강할수록 좋을 것 같다. 이것이 젊은 작가에게 기대하는 가장 큰 숙제이다. 소위 환타지가 오래 보존되기 위해서는 현실감을 지워야한다. 그리고 그 환타지의 지속이 그 작가의 작품을 충실히 감지해내는 기능을 한다면 어떻해 해서든지 현실로 빠져나오는 시간을 연기시켜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장치들이나 기법들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니까 좀 더 완벽한 가장, 완벽한 시뮬라크르 같은 것 말이다.

    ‘울트라 마린 블루’가 여기저기 엄습해오는(blooming) 전시장 현장의 이미지는 역시 비유적인 방법으로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짙푸른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 그런 느낌이랄까?

  • 파랑의 상징을 찾아가는 카타르시스 : “Bluescope 파랑을 들여다보다” -- 김미진 (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 기획&비평 )

    조은필의 “Bluescope 파랑을 들여다보다”의 전시는 긴 통로 형 전시장을 따라 푸른색실로 뜨개질된 천이 마치 심연 안에서의 거대한 일렁임을 일으키는 파도처럼 공간에 따라 설치되어 있다. 천은 전체적으로 부드러우면서 설치 부분에 따라 날카로운 뾰족한 꼭짓점을 만들어 내며 암벽, 파도, 바람의 느낌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천장과 바닥까지 전체 높이를 사용해 만드는 푸른 형태의 설치물은 색채와 질감, 형태를 관객이 지나가며 전적으로 느끼며 체험하게 한다. 실을 떠서 만들어내는 질감과 설치된 형태에 따라 조명으로 표현되는 생생한 푸른 빛깔에서 작가의 감정은 그대로 연결 코가 되어 우리에게 고스란히 이입 된다. 조은필의 "Bluescope"는 전시공간을 해석하여 그곳에 자신만의 신비스러운 세계를 창조한 작업이다. 그곳을 방문하는 자는 현실이 아닌 예술 세상 안으로 들어가게 되며 작품 속 하나의 또 다른 요소가 되어 저절로 개입됨을 느낀다. 관객은 파도 사이를 걸으며 때로는 바다 암연 안에 들어가고 하늘 가까이 날개를 파닥이는 새들의 무리 안의 일부가 되어 함께 구성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순수한 블루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라고 말한다. 파란색만을 고집하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치유하는 삶의 여정과도 일치되는 작업이다. 다양한 질료로 탐험되고 있는 개인적 여정은 다양한 감각의 공감대를 얻으며 타인에게 전이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파랑색의 의미는 하늘, 이상, 물, 차가움, 정신, 초월 등이다. 미술계에서는 추상화가 프란쯔 마르크가 “파란색은 남성의 원리이며 원기왕성하고 정신적이다”라고 말하였고 이후 독일표현주의의 청기사그룹, 클레, 이브클라인이 가장 많이 사용했던 색으로 알려졌다. 과학적으로 파랑에 가까운 자외선은 더욱 짧은 파장을 가지며, 그래서 긴 파장의 붉은 색과 인접해 있는 적외선보다 더 높은 에너지를 갖는다. 물리학에서는 유인, 충돌, 축소의 색이며 빨강보다 더 높은 열의 색으로 여겨진다.

    이번 전시에서 전체적으로 같은 색 톤으로 되어 있는 공간은 파랑의 상징을 찾아가는 여정을 표현하고 있다.
    상징의 특성은 상징의 한 끝이 닿은 곳은 현상의 세계가 아닌 불가시의 세계, 정신의 세계이며, 그것은 가시의 세계, 감각·물질의 세계로 전환시키는데 있다. 바꾸어 말하면, 상징의 한 면에는 관념 또는 사상이라고 부르는 정신의 세계가 있고, 다른 한 면에는 감각되는 차원의 세계가 있다.

    조은필이 사용한 파랑색 천은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 사이를 구체화 시키는 상징을 적절히 표현하는 재료다. 내부의 구조물을 설치하고 그 천을 뒤덮어서 나타나는 형태는 예민한 윤곽선을 만들며 외부의 세계를 만나게 하고 내부에는 어떤 세계가 있는지를 상상하게 한다.
    아직 알려지지 않는 내부의 응축된 에너지의 세계이며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행선지의 은유이다. 천이 만들어내는 유동적 형태의 추상성은 파란색 상징을 찾아가는 데 영감뿐만 아니라 역동적 에너지를 갖고 있어 신비스러운 힘이 느껴진다.
    정신과 물질이 닿아있는 색의 세계 그중에서도 이상의 색채는 현실의 물성을 통해서 표현된다. 이것은 바슐라르가 푸른 하늘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어서 그것을 물질화시키지 않고서는 그것을 몽상화 시킬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래서 조은필은 물감 대신에 색채를 갖고 있는 사물을 직접 사용한다.
    실을 성글게 혹은 빽빽하게 짜며 표면을 만들고, 빛과 공간까지 투영하면서 형태를 구성하고 공간 전체를 작품으로 만든다. 빛은 짠 표면위로 색을 반사시키고 그림자는 색을 머금고 그물망은 뚫어진 공간으로 색을 통과하고 퍼트리며 파랑의 밀도와 깊이를 표현한다. 온전히 파랑의 물질만으로 색의 변조를 경험하게 한다. 물질자체의 색으로 만들어진 형태는 심연의 본질로 내려가기 위한 기본이며 형이상학을 상징하고 있다.
    물감의 뉘앙스를 제거한 파란색 자체의 단색은 꿈속에서 보는 사물들이 표상이나 그림으로 나타난 것처럼 표현된다. 대상은 겹겹이 설치되면서 더 깊은 색채가 나타나 전체공간은 회화성을 가진다. 공간전체는 매우 환상적이고 기괴하기까지 하다. 모든 감정이 제거되고 결정체로 남은 푸른색은 순수한 이상의 극을 말하지만 동시에 사물전체를 말함으로 갑갑함 또한 느껴진다. 순수한 결정체로서 색 자체만 남기는 것은 작가로서의 절제와 자제를 넘은 집착의 단계까지라고 볼 수 있다. 그는 푸른색의 결정체를 실로 선택하여 짜기부터 시작하는데 한 땀 한 땀의 수공 과정은 퀼트작업에 비유되며 남성작가인 윌리엄 던톤이 ‘신경이 과민한 숙녀들’의 작업으로 퀄트를 규정하고 특징지었던 것을 상기시킨다.

    조은필의 작업이 욕망이 제거되고 정서적 기능도 제거된 금욕주의자의 작업처럼 보이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그러나 지나치게 관념화 되거나 물질화되기 쉬운 부분이 천을 통하여 감각을 상쇄하고 있다. 부드러운 천의 질감으로 높이 뾰쪽하게 솟아 튀어나오는 형상과 그 사이의 주름진 모습은 물체의 형태를 상상하게 하고 운동감을 주며 따듯하면서 부드러운 촉각적 성질을 지닌다. 그것은 매우 주관적인 상상력을 동반하고 초월적인 색채와 강한 대비를 이루고 스케일로 완성되어 동화적인 환상을 극대화 시킨다. 작가는 파랑하나를 통해서 극단적인 감각을 실험함으로 스스로의 정서까지를 치유하며 관객들까지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이 작업의 마지막 공간에서는 새의 무리가 비상하고 있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물망으로 된 궁전들과 공간 바닥과 벽면에 그림자처럼 실루엣으로 처리된 새들은 완전한 형태와 날개 짓을 하며 아름답고 자유롭다. 그러나 입체 형태는 그물망에 걸려 있어 아직 현실에 억압된 것처럼 보인다. 여성 미술가의 개설서를 저술한 저메인 그리어의 “불안전한 의지,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뻗어나가는 리비도 그리고 신경증적 경로 속으로 전화되는 에너지에 의해 손상되어온 자아를 벗어나서는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없다”라는 글에서처럼 블루의 상징을 집요하게 찾아가는 작가의 무한한 여정을 통해 자신의 삶과 세상 그리고 예술의 풍성함이 결실로 맺어지길 기대한다.

  • Blue beyond The Blue -- 이영준 ( 큐레이터, 김해문화의전당 전시교육팀장 )

    이브클랭의 [IKB] 그리고 조은필의 <울트라 마린 블루>

    "태초에 무가 있었고, 그리고 아주 깊은 무가,그리고 결국 푸른색의 무가 있다.
    위 문장은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의 엄숙성을 푸른색 단색회화로 비판했던 프랑스 화가 이브 클랭((Yves Klein, 1928~1962)이 자신이 어떠한 의미에서 청색을 선택했는지를 설명하면서 인용한 문구이다. 3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이브 클랭은 울트라 마린 블루와 가까운 인터내셔널 클랭 블루(IKB)를 완성시킨다. 하지만 사실 클랭이 주목했던 것은 푸른색 그 자체라기보다는 예술이 가지고 있는 비물질성과 예술이 작동하는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관계였다. 그 유명한 <인체측정(anthropometry)>퍼포먼스에서 자신은 턱시도 정장을 입고나와 물감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인체를 붓 삼아 그림을 제작함으로써 액션페인팅에 대한 비판을 통렬하게 진행한다. 또한 텅 빈 전시장과 상징적인 퍼포먼스가 결합된 <빈공간>이라는 전시를 통해 예술이 예술로 존재 할 수 있는 구조적인 관계와 그 비물질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10년 정도의 작가생활을 한 이브 클랭을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만들었고 결국 누보 레알리즘의 선구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게 된다. 다소 이브 클랭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조은필의 작품과 분명 형식적인 유사함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은필이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문제의식의 단면을 유추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외적 서사와 내적 서사
    작가는 초기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에 깊이 천착한 작업들을 선보였다. 유학전 그의 초기작에서는 다양한 오브제들이 등장한다. 권총, 라디오, 지구본, 거울, 기타, 장미, 프라이팬, 이어폰, 리모컨 등을 활용한 작업들은 무의식에 잠재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듯 어떤 ‘기억의 방’을 재구성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물은 꽃(조화)과의 결합으로 일종의 보이지 않는 파동을 형태화하고 있다. 시각화 하거나 언어화하기 힘들지만 사물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어떤 기운을 확대해서 보여주는 그녀의 초기작들에서 예술의 비물질성을 강조했던 이브 클랭의 아우라를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오브제들은 단순한 미학적 사물이 아니라 작가와 깊은 유대를 형성하고 있는 물건들이며 자신의 삶과 기억을 호출하는 무의식적인 기제들로 읽혀진다. 이후 작가는 계란 포장지나 박스 등을 반복적으로 구축하는 일종의 설치작업을 하였으며 이 시기 서서히 울트라 마린 블루는 점진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까지의 작업에서 색에 대한 ‘자의식’이 느껴지진 않는다. 작가는 영국 런던 유학시절을 거치면서 울트라 마린 블루에 대한 강한 이끌림을 경험하게 된다. 아니 보다 엄밀하게 이야기 하자면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기억 속 실재를 끌어내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른다.
    유학 초기 작가는 자신이 선택한 사물들을 결합한 푸른색 옷을 입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머리에는 푸른 가발을 쓰고 얼굴과 손을 제외하고는 온통 푸른색으로 둘러 싸여있는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바비인형에 파란물감을 칠한 다음 이를 종이에 찍는 작업을 선보이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 이브 클랭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작가는 세계최초로 인형 오브제를 이용한 인체측정(anthropometry) 퍼포먼스를 한 셈이 되었다. 이제 울트라 마린 블루는 작가의 작업에서 빠지지 않는 요소가 된다. 작가는 곰 인형들로 섬유 뭉치를 만들고 파란물감으로 행위를 기록하는 거대한 퍼포먼스를 진행한다. 결국 자신이 만든 섬유 뭉치와 바닥이 모두 푸른색으로 변하고 나서야 이 퍼포먼스는 멈춘다. 작가의 석사학위 졸업 작품은 더욱 압권이다.
    라 명명된 이 작품에서는 화려한 장식들로 치장이 되어 있지만 온통 푸른색으로 칠해진 그 느낌은 스산하게 느껴질 정도다. 모노톤의 사물로 채워진 작가의 방은 초기에 보여주었던 사물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푸른 빛 세계로 열려있었다.
    작가는 이번 설치작업에 앞서 <일렁이는 브릿지>, <일렁이는 궁전>이라는 작품들을 발표했었다. 유학시절 회고의 감정이 점철된 런던 브릿지는 작가에게 있어 고정된 어떤 실재가 아니라 일렁이는 푸른 사물로 대체된다. 뿐 만 아니라 육아와 출산의 경험이 반영된 <일렁이는 궁전>이라는 작품에서 보이는 신기루와 같은 형상은 자신의 삶을 반영하는 오브제 들이다. 2011년에 발표된 <채울 수 없는 꿈>이라는 작품은 서랍에서 스며 나오는 푸른색의 형상이 전시장 벽면을 뒤덮고 있다. 역시 같은 시기에 발표한 <블루 너머의 블루>시리즈에서도 영상의 주제가 되었던 새를 비롯해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사물들을 자연스럽게 등장시키고 있으며 그 사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색을 탈색시킨다. 그리고 그 탈색된 사물은 어김없이 푸른 사물로 재등장하게 된다.
    이번전시에서 작가는 뜨개질로 만들어진 천으로 거대한 산수화를 표현하였다. 뜨개질 한 푸른 천과 그물망으로 형태를 만들고 한 두 사람이 겨우 걸을 수 있는 조그만 길을 만들었다. - 사실 작가는 전시장을 온통 푸른 천으로 포장하려고 했었다 - 관객들은 작가가 만들어 놓은 연출된 공간을 거닐면서 푸른색 세상을 만끽하게 된다. 산 능선이나 바다의 물결처럼 느껴지는 거대한 설치물 위에는 실을 나르는 새들의 영상이 반복되어 투사된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쉬지 않고 고도를 정복하기 위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영상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이러한 형상들에 작가는 서사를 구조화 하거나 메타포를 상정하지 않는다. 작가의 주된 관심은 오로지 작가 자신 혹은 울트라 마린 블루이다. 바로 이 지점이 이브 클랭과 조은필의 푸른색이 뚜렷하게 이별을 나누는 지점이다. 이브 클랭은 IKB를 통해 푸른색 바깥에 유유히 존재하는 예술의 정신성을 바라보게 만들었지만 조은필은 그 푸른 세상 속을 헤집고 다닌다. 그리고 그 푸름에 집착하는 자신의 연원에 대한 한없는 여정을 떠난다. 사실 인간의 사유는 비선형이다. 과거 작가가 선택했던 수많은 오브제들에서 논리적 인과성을 도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조은필은 자신의 내면에 새겨진 다양한 감정들을 형태화하기 위한 시도를 감행하고 있다. 바로 이 태도는 미술의 외적 서사에 주목했던 클랭과는 대척점에 위치해 있다. 작가는 자신의 내면 깊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

    블루 그 너머...
    작가의 서술대로 울트라 마린 블루에 집착하는 이유는 선명한 것이 아니다. 아니 선명하지만 이를 언어화 하거나 시각화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뚜렷한 물질적 연원을 드러낼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을 사유한다. 시간과 기억의 문제에 대해 일찍부터 성찰해 왔던 철학자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에 의하면 ‘기억’은 ‘생명’ 혹은 ‘지속’이다. 우리는 어제를 살았던 기억으로 오늘을 산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연속성을 상실하게 되고 연속성의 단절은 곧 ‘의식의 죽음’ 혹은 ‘물리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베르그송은 ‘기억’은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축적’ 되어지며 이들은 무의식이나 의식 속에 깊이 각인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실용적이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것들이지만 무의식속에 깊이 담겨져 있는 기억은 실재(The Real)의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런 면에서 조은필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울트라 마린 블루는 런던브리지, 궁전, 동물, 오브제들과 함께 자신의 기억 속에 축적되어 있는 것들이다. 가령 어떤 사물, 색, 냄새, 형태를 통해 기억 속에 잠재했던 사건이나 인물이 연상되는 것처럼 ‘기억’은 의식 혹은 무의식속에서 불연속적으로 떠오른다. 이 ‘기억’은 의식의 개입이 최소화 되어있는 영역이며 그 연상의 방식은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상호 결합되면서 알 수 없는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조은필의 작품이 가지는 해석불가능성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그런 면에서 조은필이 선택했던 그 많은 오브제들과 울트라 마린 블루는 바로 자신의 기억 속에 축적된 ‘자신’의 형태와 색이다.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이처럼 특정한 ‘색’을 작품의 모티브로 설정하는 작가는 매우 예외적이다. 작가의 여정이 어디서 멈추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다행스럽게 울트라 마린 블루로 캐릭터화 된 특별한 아티스트 한명을 우리 곁에 둘 수 있게 되었다.

  • 미치도록 blue! -- 김가현

    '파랑은 무한하고 신적인 일치감이 지배하는 공허다‘ - Max Heindel -

    사람마다 잘 쓰는 언어가 있다. ‘블루’는 조은필에게는 가장 오랫동안 그녀를 대신해 줬던 언어이다. 일반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블루란 단어의 경직성이 작가의 손을 거쳐 완전히 의미가 다른 새로운 단어가 되었다. 일종의 파격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녀의 블루는 그녀와 함께 움직인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대상의 형태가 아니라 색에 집중하는 방식은 오늘날 미술 경향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다. 곽인식, 이우환, 박서보와 같은 과거 1세대 모노크롬 작가들의 회화가 그런 측면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모노크롬은 지극히 평면주의를 지향했으며, 그들이 추구한 궁극의 회화관은 색을 바탕으로한 우리 전통적 회화의 여백에 대한 감성적 실험이었다. 그러나 조은필의 블루는 조형성을 논하기 이전에 그녀에게는 정신이며, 전작과 다름없이 이번 미술공간現에서의 작업들도 작가자신만의 blue를 보여주기 위해 조각과 회화, 설치의 영역을 하나로 통합한 집요함과 더 완전한 블루를 찾기 위한 여정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조은필은 'blue'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의 지평을 탐구한다. 눈에는 보이지만 잡히지 않는 추상적 색을 재료로 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작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삶의 면면에서 접할 수 있는 수많은 형태와 소재들에 파랑색을 대입시켜 가장 적절하며 완전한 조화를 보여줄 수 있는 미학적 안목과 실력을 키워갔다. 동시에 복잡미묘한 감정과 애환이 뒤섞인 개인사를 파랑이라는 이름과 함께 성장해왔다고 한다. 그래서 조은필의 기억과 감정의 단편들은 이유를 막론하고 결국 파랑이라는 하나의 색깔로 마침표를 찍는다. 작가는 파랑을 알면 알수록 더 순수한 파랑을 찾기 위한 욕망이 생겼다. 완전한 백색, 완전한 검은색과 같은 완전한 블루. 이 티끌 하나 섞이지 않은 광기의 블루를 보고 싶은 그녀의 집착은 전공인 조각을 통해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극복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런던 시절 그 허기를 채우기 위해 입체적인 조형물과 평면, 드로잉, 비디오 작업까지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하면할수록 기법의 과잉이 오히려 순수한 블루의 존재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치 이브클라인의 IBK(International Klein Blue)같이 ‘플르트로 한 가지 음을 끝없이 내는 것처럼’ 그 강도에서 어떤 변화도 느낄 수 없는 블루. 조은필 작가도 그런 순도 100%의 사색과 같은 블루를 원했던 것이 아닐까.. 필자는 생각한다.

    한국으로 돌아온 작가는 블루를 에워싸던 수많은 필터를 걷어내고 다시 단순함으로 돌아갔다. 조형적 기법에서도 2차원과 3차원을 동시에 넘나드는 뜨개질을 이용한 작업들을 구체화 시킨다. 신작 “블루 너머의 블루”, “일렁이는 궁전 그리고 "일렁이는 브릿지”가 대표적인 결과물이라 보여진다. 이 작업들은 실 하나하나를 평면상에 겹친 2차원 배열을 통해 3차원 덩어리를 만들어 내는 뜨개작업으로, 작가는 데자뷰처럼 기억 속에 생생히 전달되는 상황들에 대한 감정과 사유들을 현재라는 공간에 그대로 재현시켜 시공간을 초월한 기억들이 씨줄 날줄 얽히면서 그동안의 여러 가지 변화들로 인해 무너졌던 자아를 다시 찾아가고, 과거의 나를 위로해주는 자기 치료를 하고 있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이 작품들은 일단 블루라는 키워드로 복합적인 형상을 색으로 통일시켰다. 어떻게 보면 인위적인 풍경이다. 일상과 기억. 내가 기억하는 시간과 객관적 사건의 간극이 만났을 때 사실과 허구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추상적인 블루의 힘을 빌리고 있다. 뜨개실 하나하나는 가장 사실적인 사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비현실성과 추상성이 나타나는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현란하게 짜이지도 날카로운 묘사력도 없지만 대신 느긋하고 일상적인 시간의 교직(交織). ‘소리나는 대로 받아쓴’ 작가의 일기이며 시가 읽혀진다. 이것은 옛 기억과 새로운 기억들이 공존하는 중간지대이며 재생과 환영이 동시에 보여지는 청색의 심연이기도 하다.

    실재론자들은 하나의 색채가 실재를 그대로 복사해내는 거울인 것처럼 생각하며 표현되어 있는 색채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에 반해 수많은 색채이론가들은 색채는 거울이 아니라 구성되어진 삶 자체이며 고정된 무엇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항상 동적인 에너지를 지닌 생생한 운동이라고 주장해왔다. 조은필의 작품을 보고나면 우리는 실재론자들의 이야기보다는 색채이론가들의 주장에 마음이 갈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설치예술로는 보기 드물게 명상적이며 이 명상적인 힘을 더 하는 것은 우주적인 색상 블루이기 때문이다.

    색은 인류문명사의 고비마다 불가사의한 문화적 성취를 종종 이끌어낸 힘이었다. 대부분은 신앙에 바탕한 상징적 의미들이 색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정신적 에너지와 상상력을 주었다. 특히 “블루”라는 색은 역사 속에서도 이중적인 위치에 있다. 희귀하고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 존재를 ‘oiseau blue’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긍정적이고 이상적인 힘을 나타낼 때도 있고, 우울함, 울적함 불행, 비극성 공허함, 극도의 고독을 나타낼 때도 이 블루라는 색은 등장한다. 우리는 조은필의 이번 전시에서 블루의 이런 2가지 극단적 힘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성찰과 반성의 마음, 그리고 생명감이 충만한 서정적 세계를.

  • 타자와 소통하고자 하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개입하는 것이다. -- 강선학

    코끼리, 곰, 코뿔소, 사슴, 새 등 동물 문양을 그려 세워놓은 것이 조은필의 이번 작업이다. 그런데 시선의 각도를 조금 달리하면 동물의 형태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다. 동물의 형태랄 어떤 제시도 찾기 힘들다. 그저 실로 꿰맨 듯한 골판지와 실오라기들이 여기저기 보일 뿐이다. 설치작업으로서 특별한 장치나 구조물도 보이지 않는다.

    크고 작은 동물 장남감을 적당한 간격과 동선으로 설치한 듯한 전시장 안은 푸른 색채로 넘친다. 유아들을 위한 장난감 방 같다는 인상도 준다. 그만큼 친근하다. 동물들의 모습은 온전하고, 크고 작은 차이가 생태적인 크기와 무관하다는 것 말고는 특이한 형상이나 정황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런 설치가 동물 형상의 단조로운 나열이 아니라 시선에 따라 필연적으로 해체되고 만다는, 그것들이 구성된 형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온전한 몸통을 가진 동물이 납작한 종이 몇 장으로 이어진, 수직으로 잘려나간 몸통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온전한 부피, 무게, 두께가 아니라 부피도 무게도 두께도 없는 어떤 구성체로 덜렁 드러난다. 그 순간 관람자는 정면과 측면 혹은 후면을 새롭게 보게 되고 몸을 움직여야 온당한 몸통과 그렇지 않은 몸통(?)을 번갈아 보게 된다. 시선의 착각을 이용한 효과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구성이 그런 정황이다. 그리고 통합된 하나의 시선으로 형태를 파악한다. 부분일 듯한 평면에서 어떤 온전함도 추론하기 힘든 형태를 보게 되고, 그런 부분들이 모여 온전한 형태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세로나 가로로 몸통을 잘라보는 것은 병리증상을 단층촬영 기법으로 찾아내는 의학적 기술이기도 하지만, 이런 층위에 대한 분석은 고고학이나 다른 학문에서도 원용되고 있다. 하나의 현상을 이루는 내면에 형성된 요인들을 시공간적 차이를 한꺼번에 보아내는 것으로, 요인의 상호연관을 층위를 통해 이해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조은필의 작업(Blue Obsession)은 일견 색채나 형태 구성에서 단조로운 인상을 주지만 생명체를 수직으로 분절해서 재구성한다는 독특한 태도 때문에 그 단조로움은 여늬 이해와 다르다. 분절된 하나하나의 평면들은 본래 가진 몸통의 특징을 내재할 것이라 기대하게 하지만 이런 특징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일부가 특정한 형태나 색채나 다른 의미를 보여주는 전환적 역할도 하지 않는다. 입체감을 구성하기 위한 최소한의 부분으로 개입되고 있을 뿐이다.
    제시한 동물을 측면이나 후면에서 봤을 때, 온전한 몸이 아니라 평면의 종잇장과 종잇장을 잇는 실 가닥을 보게될 뿐 온전한 몸통을 가늠할 수는 없다. 부분이 전체에 기여하기보다 전체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셈이다. 그 연관은 평면으로 바라볼 때 전체의 외곽선을 이루는데 겨우 기여할 뿐이다. 입체와 평면, 요소와 전체, 해체와 결합의 통합적 이미지는 정면에서 바라보는 평면일 때 뿐, 시선을 돌리면 여지없이 통합적 이미지는 사라지고 만다.
    그에게서 동물형상을 만들고 색을 칠하고, 입체감을 내기 위해 몸통을 곮판지로 분절하고 그것을 잇는 작업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한 편의적 방법의 하나일까. 분절된 이 형상들에서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 혹은 우리가 만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런 의문은 그의 비디오 작업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공을 굴리면서 연출되는 (Lets play with my bolls)라는 비디오 작업은 실내 여기저기에 공이 구른 흔적을 남긴다.
    그것은 어떤 의미를 생성하거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 개입한 흔적일 뿐이다. 이번 전시 (Blue Obsession)도 분절이라는 행위 측면에서 비디오 작업의 연장선 위에 있다. 개입은 어떤 의미로, 특정한 행위를 더 보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타자 속에 개입함으로 타자를 하나의 행위로 끄집어내는 것이다.

    나에게로 타자를 불러내는 것, 그것이 개입이라면 그의 이번 작업은 이미지나 의미의 생성이나 새로운 설치기법이 아니라 동물의 몸통을 층위로 나누는 것에 자신을 개입시키는 것, 그래서 타자가 내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세계에 개입함으로 타자를 주체화시키는 것이다. 개입함으로 세계는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내가 개입하는 것, 그것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것은 의미가 아니라 행위로 세계를 보는 것이다.

English

  • The Familiar, Stranger Than That Blue -- Hwang Sukkwon (editor-in-chief, Monthly Art Magazine)

    Encounters with situations or objects never before experienced are often described using adjectives like “unfamiliar” or “strange.” The ensuing stimuli are sometimes associated with the sort of aesthetic experience reminiscent of the modes of representation expounded by Western surrealist artists, or their methods of implementation—to wit, nonsensical logic that challenges rules or order; strangeness discovered in situations unfamiliar or familiar; combinations of objects that are utterly and apparently incongruent; the detection of formerly unrecognized objects; the adoption of grammarless hierarchies and systems. When we encounter works that incorporate elements like these, we feel a sense of liberation; exposed to worlds from other dimensions and plausible possibilities distinct from the realm of the imaginary, we are allowed to escape the “obvious.” In a life of mundane sameness where today is just like yesterday and tomorrow is just like today, what in the world could offer such an opportunity?
    The works of Cho Eun Phil usher us into encounters with a variety of such unreal situations. Drenched in a purplish light containing madness and melancholy, or an overwhelming shade of “ultramarine blue,” the objects have been stripped of their original forms and functions, and the visual impact of the artist’s unique approach to space brashly assaults the viewer’s optic nerve. The central axis of her oeuvre is formed by spaces and objects found nowhere else in the world, wholly and thoroughly blanketed in blue through the artist’s singular will.
    It is not simply a matter of the ever-present blue used in Cho’s work; the significance held by any particular color is to some extent fixed, bound to be interpreted within the symbolic framework of the usual cliché meanings. While individuals associate colors with different psychological states or with personal symbolism, historically approved meanings within a community or Gemeinschaft are often transferred in similar form to its members. Cho’s blue is no exception. In the course of a human’s life, blue is one of the most readily perceived colors, the color of nature itself. The sky is blue, the sea is blue, and (even if we haven’t seen it firsthand) the very Earth upon which we Earthlings stand is known to be a blue planet, shining in space. The color blue also carries heavy social meaning, as cultures all over the world have iconized it as a signifier of one gender or the other. So, there may be no other color whose conventional interpretation, conceptually and meaning-wise, is harder to escape, or whose perception requires such submission to the so-called “order of the world.”
    Then why would the artist have chosen such a tough color to express her personal intent? When she first started making art in earnest, her wholehearted, thorough-going, and singular use of blue, she confessed, arose from an obsessive “compulsion” that has had a hold on her since before she can remember.

    “I have almost an obsessive compulsion with blue. I want to fill my space with that color.” (Artist’s statement, 2018)

    After appearing so early that she herself does not remember when it started, why does this excessive obsession with blue still have a hold on her? She says only, “I don’t know, either.” No matter how hollow that answer may sound, it could actually rather be heard as an aside to herself: “That’s just how I am!” Just like the inescapable mundane routines that add up to a tiresome existence, the color blue is something that has always been in Cho’s life—like food, clothing, or the air she breathes. Though she cannot remember when or why the obsession started, it lies coiled deep in her mind, exerting a constant influence on her work, and she will not be able to rid herself of or overcome this obsession until its origin is identified. The blue objects and spaces which she has constructed are thus, in themselves, equated with the artist’s self. She continually transforms herself into non-routine entities, yearning to revert to occupying unreal spaces.
    Another prominent characteristic of Cho’s work is that her forms are not marked by solidity. Despite being unified and complete, having been perfectly finished, the forms do not appear closed. Works such as “Blue Beyond the Blue” (2012), “Choppy Castle” (2011), and “Choppy Bridge” (2011) are marked by softness and flaccidity, appearing liable to bend at any moment, as if unable to stand on their own, conspicuously mollusk-like. They are forms that could not have been built without an internal structure corresponding to a skeletal framework, yet they stand firmly in space and even expand it. Is it because they use the technique of “knitting” or “crocheting”? Where the flexible materials join each other, there is evidence of “time” elapsed, or traces of actions which have been visualized by the artist. Occupying space with a mesh of time, this intangible element is expressed as palpable tactile objects.
    In addition to the technique of covering entire objects with a single color and visualizing the intersection of intangible elements, another device which makes Cho’s works even more unreal is her method of staging them in a way that goes against accepted rules. All the trees in her work exhibited here are located at the polar opposite of any possible natural order: they are on their sides, afloat in the air. The only trees we know have their roots down in the ground and trunks reaching up to the sky. The turf that trees can occupy and their point of orientation are clear-cut. Therefore, floating trees with delicate roots suspended in air totally contradict our conventional perceptions and do not belong to our reality; she has turned once-natural objects into imaginary objects that belong to a new and surreal space.
    Then how is it possible for trees growing on their sides in the air to exist? Existing in a space that could never exist, are they dead things? Not so; rather they welcome us from a new spacetime in which different laws of physics are at work. We have already entered a different spacetime. This passageway could be conjectured as a wall installation. Serving as a kind of doorway, it is a place through which we can enter and at the same time leave. So, Cho’s blue trees act as a sort of compass.
    Meanwhile, there is one fact that demands our attention. Tree branches are exceedingly ordinary and insignificant things that no one pays attention to, being ubiquitous in our environment.

    “None of the trees are the spiritual guardian of some village, or a shrine for some great deity; none of them are a hundred or a thousand years old (…). Nevertheless, rather than just waving off the trees’ time (life), death, and existence (…), I wanted to record them through my creative works, even though they can never go back to their former lives.”(From the artist’s statement)

    In fact, the artist has no qualms about revealing that she did not labor long and hard to find trees possessing some special history as her targets, but rather chanced upon these random trees “by the grace of God.” It was just destiny that they were unable to sustain life and were culled against their will, being rooted in hostile soil conditions. If the artist’s intention had been to make art that highlighted the objects’ ‘auras’, she would have looked for trees tied to some sort of story. She would have adopted those stories as her motif or subject, making a sort of documentary. Instead, the artist chose to leverage these defunct lives into compositions of motionless and immobilized space. What the artist wanted to reveal through the non-visual passage of time amounts to a transitional turning point. Rather than existing within the boundaries of finite space, time, by its nature, just keeps flowing with no particular directionality, overcoming physical limits.

    “… To facilitate the transcendence of the unbounded infinite and of the tree’s death (time), I tried to create a visualization of a speculative space where time is frozen and spacetime has been outrun.” (From the artist’s statement “From Space to Time”)

    But here, a strange refusal to yield to a normal way of looking at her work arises. Actually, the way to pull back from a fixed view of her work is as clear as can be. It is to get rid of the obsession with the visible, with what is seen, and any accompanying stereotypes. Such resistance is parallel to the artist’s creative approach, since both challenge the order of an already-fixed world. To this end, I tried to ignore the dominant element of the color “blue,” an element which no art critic could fail to mention in describing Cho’s work. Though it is hard to escape, I tried to block out the blue, not wanting to focus merely on the outer appearance of her work.
    However, rather than persisting in ignoring it, I ended up wanting to try to embrace the blue as if it were something familiar. After all, the artist also admitted that this exhibition is a turning point in the way she uses her signature color. She elaborated the reason: the traces etched by nature on the surface of the old tree from a humble background, culled and taken from the natural world, were something that could not be subjugated simply through her longstanding trademark act of applying a coat of blue paint. In the face of this admission by the artist, it seems that these new guidelines for appreciating Cho’s work—of not succumbing to the element of blue—had to be scrapped. That element became something to embrace rather than to surmount, something to warm up to rather than to fight. Then, does the perception of Cho’s work result in circular logic? I think not, insofar as her work enables a leap to other dimensions, not lying on a single axis, but rather seeming to exist on an axis that is twisted, or seeming to be transported to a whole different axis.
    Still, in the exhibition space, Cho’s works look strange and unfamiliar. But maybe we’ll get used to those objects and that space. She is getting ready create more perplexing situations and objects that once again turn “familiarity” to “strangeness.”

  • Surprise Attack of Blue -- Kim Young-Joon (Curator, Busan Museum of Art)

    Surprise Attack of Blue

    Everyone has their favorite color. Color is not only visaully recognized object which is arised from optical phenomenon, but also creates a lot of social symbols and descriptions. And each color has their function making various effects. Also colors are concerned with humane mental process directly and sensitively. Each person has preference for color. So colors are selected along tastes. It appears as diagnostic symtom if one obsesses about specific color. But as expression of symptom, creative and artistic imagination is encouraged.

    For artists, color is an absolute thing. Color functions as motivation of various art world, purpose and result itself for them. But color itself is still unstable. Color is thing we should sense, but it is also the thing completed at last when it is reproduced as a substance which desires connecting to various social meanings. Like grief and solitude is completed when imagination of film is painted connecting to low-saturated wether based on blues music. So do cleanness and purity which seem white without any reasons.

    The artwork of artist Cho Eun-Phil is constituted only with color of blue from the beginning. Sometimes the specific color sense she uses is very graceful, mysterious, static and glooming. This sensibility already had been assumed after the artist selected the color. The next things are respects of shape and location. Sometimes detailed shapes appear with color of the Blue, and sometimes only abstract forms of the Blue appear. The effect of her artwork is the very her aesthetic sense, saying breifly, it means a blooming of specific feeling consisted of some colors. So it is very aggressive. Her Blue doesn't come as attaction, but coloring gradually. And we become increasingly familiar to it. So it is more implicit and unexpected. If we try to turn our eyes to avoid it, we fail shortly. Because there is the Blue lurking everywhere.

    It is inevitable to say about her artwork mainly with color. But it cannot be said that color represents her artwork. She leads with the way of space installation and goes to construct some shapes mixing with various materials. Sometimes detailed shapes are constructed and sometimes abstract works are made. The important thing is that her work is mostly substituted to characteristics of space. It is applied to indoor and outdoor space including white cube space, not the space of exhibition. In other words, subject of her work becomes space given everytime with the Blue. Most space installation art so does, her artwork is not facing with us toward front. Sometimes we should stand in her artwork, and we should utilize range of sight from crown to toe to see her artwork. Her object and channel around us has strong and impressive local color.This is margins that we can expect when we remind her work. The Blue became her icon to such an extent as that people who know the artist associate the artwork of blue when they remind her.

    The Blue of Cho Eun-Phil was a 'feather' during 2016. It shows paused space like that various size of feathers flutter and then stop in the air. So we can witness the state which would be out of force of gravity. We can see from big feathers which are incomprehensible with common sense to all states of feathers. The feathers formed with plastic resins are colored blue beyond any doubt. And they are hung in show room by invisuable strings. Saying in common word, it is a space installation artwork.

    Actually the effect of Cho Eun-Phil's artwork was similar before. So does the installation of an abstract shape with knitting wool and fabric, and so does the artwork of epiploon. 'Surprise Attack' of specific feeling was more effective. But 'surprise attack of feather' was unexpectable strike. Herefrom there are some things to examine. Why feathers? And Why the feathers are transcending sclae beyond common sense? Blue feathers are installed fluttering in limited space of show room, while a big feather is installed expressing the moment before it arrives on the surface of a lake. Like it ignores the force of gravity.

    Feather we know is the thing dropped out of a body of bird and it has very light feature. But the feather of Cho Eun-Phil cannot be infered the body of bird and does not seem light. This can be nearly thought that it has technological flaw and unskilled shape. Instead, the blue and massive feather seems to want to be the signified, rather than the signifier. Not to be 'the thing which (seems to be) dropped out of a bird', but to be 'the thing which was seem like this originally'. The feather of Cho Eun-Phil is a feather as an icon, like saints of medieval icon paintings became image itself because of strict drawing techniques. So the true feather itself suggests new situation than the effect of sybolic and direct feeling (which was maintained as 'surprise attack' beyond) brought by Blue. The big feather arriving on the surface of lake shows description like fantastic fairy tale with lake in the background. So the effect of feather adds another effect which completes a situation by placing. Artworks of past were directed and made by artist herself. But the feather makes new environment for feeling just by adding to. Like good mood is made around during drinking a tea with a leaf of herb. Finally this is an augmented reality.

    The journey of her artwork, which has started with strong motivation of the color, Ultramarine Blue, is considered to be able to try change from the feather. Naturally the change may not be recognized by artist herself. I, who have watched her artworks for longtime, had been worried and expected about how she would change at what point of time. But I could read out new encouraging possibility as a kind of soft landing of change or developing change. Now I expect that massive descriptive storytelling will be possible. First of all, I can say at the point that the artworks starting from ultramarine blue at the first time are increasingly trying to enlarge a range of usage with various color sense of blue. Even though they are not derived to various colors, we can see the trial to enrich color sense of blue. Additionally 'feather' comes in. As we witness the 'feather' in show room, other indoor or outdoor space, we would be absorbed into new imaginary scene, not of reality. Through the intervention of this 'addition', it became possible to induce to more flourish feelings about new situation.

    If we can define the artworks of Cho Eun-Phil as 'Surprise attack of Blue', We can say about various status of 'Blue of Cho Eun-Phil', and further the aesthetic direction of Cho Eun-Phil. At the point of change, The reason why I expect to ongoing artworks is based on it.

  • Blooming Blue -- Kim Young-Joon (Curator, Busan Museum of Art)

    Blooming Blue

    Have you ever seen a bronze sword in historic relics showcase of museum? Even if not a bronze sword, it's ok. Ivy covering up a red brick wall of old house and moss formed between rocks so are. The reason why I feel awe of those things is related to a behind story about the time and space they have lived. I mean the stories like that have endured restrictive space and time or have enjoyed golden space and time. It's not an only thing. It cannot be excepted to praise a shape of buildings whether the old house means an old castle or a realigious holy stuff. It does in the generality of cases. But there is one more thing to take attention. It's the color sense. Storytelling, aesthetic sense of shape, or color sense determine the things which stimulate our aesthetic sense.

    Even if it has lost the essential use value as a bronze sword, I pay attention that it comes to obtain new value as it is stated in the showcase. On the line of abstract time beyond our senses, the awe of firmness visually manifested makes ritualistic effect. We silently gaze and admire at the sword which would be used in a battle or hunting field by someone, or represent a status of someone. In the 'witness', the firmness called as visual menifestion, addition to the shape of antique the bronze sword retains, a harmonious color has charge. Complementary colors contrast which the rust of the sword blade does not repel each other snatches our eyes. Look at the result brought by oxidation of bronze sword. That does not have any aesthetic reasons and purposes. It is same with the green ivy on red bricks or moss. Being antique is determined by sense of shape and color, over historic stories. Like Good-looking blue porcelain vase snatches our eyes and mind. What kind of description about the charm of blue porcelain vase is needed? It's so-called sensitivity to arts. Therefore an artwork is valueable not just as a material existence, but a complex of meanings.
    Like a relation between bronze sword and bluish green, in the realtion of red brick wall and green ivy or moss, when the local colors of them repel, join, response and communicate each other, we can see admirable effect of coloration.
    What I've witnessed is an equipment and directing. Saying more pushfully, it is an artwork of methphorical effect considering sight of observers. An artist Cho Eun-phil made an imaginary brick wall in gray line and blue moss implanted between bricks, therefore one side of the wall is filled with visual equipment at which we can get special experience as a stage setting. If the effect of bronze sword or old house was a visual dynamic brought by complementary contrast, we can say that her artworks make the effect of simultaneous contrast of blue on gray background polished. Besides this brick wall connect the sense of antique to fantasy ironically. So green moss on red brick wall she made reminds us relavance with a fantastic story which has an unknown behind story ,like connecting to a story which starts with 'long time ago, this old castle...'. But the story arises from blank or space between the lines. With human-made behind story which any audiences can make free with imagination. So the work of artist Cho Eun-Phil moved marvelous objects we often witness in our life into art work. So her work is spectacle. Even though installation art is spectacle in general, she places spectacle itself on the core of her work. There is one more thing catching our eyes. She located some immitated columns of ancient chapel into showroom. Then unidentifiable things occupy the ceiling and the floor of intervals between each columns without any stationary form. The thing deep blue is directed like rain cloud is rolling in or lava is flowing on the floor. It also has uncommon shape and color. Setting aside the exact metaphor chapel's columns, we cannot know the location of this fluttering thing. What do the relation impossible to go with, unreasonable connection and state say? We get into confusion seeing the cohabition of reality and unreality. The metaphorical usage is still valid. Beyond spectacle observation, it is nervous, unstable and ominous.

    I'm going to say briefly the appreciate of the artist, Cho Eun-Phil's exhibition [Blooming Blue]. The color is very important at her works. It is entirely blue which majored in ultra marine blue exactly. This color is full of deep blue and purple. Her Blue is not an easy target. It comes over the space observers stand on. It fills up everywhere without distinction of directions. Her work overcomes the unit, tableau. The character of model is revealed through space direction, cause it is not a work to face, but a work to get in. It shows value of color enoughly setting unreasonable relation and directing as stage set.

    The tite of exhibition, 'Blooming Blue' seems to intend to bring interest of nuance, which can be obtained through repeating phoneme. But like the meaning, Blue is a word which also summurizes state of the work best. It is worth to pay attention in a respect that it contextualizes abstract feeling obviously which can be felt from Blue. The prolonged sound from which we pronounciate 'Bloo Blue' works like a mimetic word. It expresses the state of show room as 'Blue Blue', behind the nuance, it comes to mean 'Blue is blooming'. I can say that it's attractive idea enough. Cause her work has stern allegory, we don't have to say hidden behind stories or understand conceptual context of condition of work. Also it isn't dependent to feeling at all as seeing abstract paintings. Just as finding similar figures of animals when we seeing blooming clouds, we reach to the spectacle of the feeling of 'Blooming Blue'. This illusionary effect seems to be better, the longer it remains. It is the biggest task I expect to this young artist. Sense of reality shoud be erased to preserve so-called fantasy longer. And if the prolongation of the fantasy functions sensing the artist's work truly, she must delay the time we get out to reality by all means. To do so, it seems to need many equipments and skills. I mean more perfect, the more perfect simulacre for example.

    The image of show room in which 'Ultra Marin Blue' is blooming from all directions can be only said by metaphor. The sea which deep-blue wave crowding into. Doesn't it seem like that?

  • Blue beyond the Blue -- Youngjun Lee (Curator, Gimhae Culture Center )

    [IKB] of Yves Klein and Eunpil Cho’s [Ultra Marine Blue]

    "I did not like the nothing, and it is thus that I met the empty, the deep empty, the depth of the blue."

    The above sentence is from the French painter Yves Klein. Klein (1928~1962) was a French painter who criticized abstract expressionism with his blue mono-color paintings. The sentence is one of his quotes explaining why he chose blue. Yves Klein, who died at the young age of 35, developed International Klein Blue known as IKB that is close to Ultra Marine Blue. However, his attention was not just on the color of blue itself but the relationship of the meaning of art and the society where the art is working. Yves Klein’s anthropometry events were one of the key events in the history of painting and performance. He used naked women as ‘human paintbrushes’ to make his ‘Anthropometry’ paintings, which were produced as elaborate performances in front of an audience, and Klein, in bow-tie and suit, didn’t apply a drop of paint himself. He really marked a shift in action painting. In addition, he symbolically showed that art could be just art though his work ‘The Empty Gallery’. These art works made him an internationally famous artist in the 10 years of his artistic life and identified his name with the frontier of nouveau realism. The reason why it’s important to recall Yves Klein is his connection with Eunpil Cho’s work, and to give better understanding of her mind and approach in art.
    Internal Description and External Description At first the artist inquired as to the symbolic meaning of the object. Before she studied abroad, she used various objects such as a handgun, a globe, mirrors, a guitar, a rose, a frying pan, an earphone, a remote controller, and so on. These works were restructuring a room of memory as if she were revealing herself through her unconscious mind. The energy generated for objects is not easy to visualize or to put into words, but she tried to magnify her energy and show it in her early work. This shows a similar sense to Yves Klein’s “non- materialistic” art. Such objects are not just things but very personal. They have a deep bond with her and could be translated as unconscious triggers that recall her memory. Afterwards, she started to do installation art by repetitively building things such as egg cases or boxes. Around this period, ultra marine blue started to be used gradually in her work, yet she didn’t establish her consciousness of color. She first experienced the strong attraction to blue while she was studying in London. To be more accurate, she recalled her love for this specific color which already existed hidden in her memory. In the beginning of her London period, she did a performance art piece wearing a blue dress made of things she selected. She wore a blue wig on her head, and covered herself with blue things In another performance, she put blue paint on a Barbie doll and stamped it on paper. She happened to be the first artist who did anthropometry performance using a doll.
    She first learned about Yves Klein around this time. From that time, ultra marine blue is in every piece of her work. She did a performance piece making a big pile of teddy bears which she started to paint with blue ink. Her performance ended when her teddy bear pile and the floor finally turned all into blue. Her MA graduation work titled Mad Blue World is one of her highlights. Although it was in a very ornamented setting, the performance covered with blue felt dreary. Her room filled with monochromatic things led her into a blue world and away from her initial interest in objects.
    She exhibited ‘The Swaying Bridget’ and ‘The Swaying Palace’ before this installation. London Bright is a memento of her time in London, and she reproduced the bridge as the swaying blue thing rather than a fixed thing. ‘The Swaying Palace’ is a work that reflects her experiences including childbirth and infant care. In another work, ‘The Insatiable Dream’, blue things coming out of drawers covered the wall of the exhibition space. In the series ‘Blue beyond the Blue’ released around the same time, many animals were used as secondary subjects in addition to the bird which was the main theme.
    She uses various objects from her life, decolorizes them, and recreates them as blue things without exception. In this exhibition, she expresses a landscape painting using a huge piece of knitted fabric. She made a narrow path in which barely two people can walk together surrounded by knitted fabric and mesh. In fact, she wanted to cover the whole exhibition hall with blue fabric. The audience can enjoy her blue world while strolling down the path she created. Above the installation appearing like a mountain ridge or an ocean wave, is the image of birds carrying threads. On the other side, the image of people relentlessly climbing the mountain to reach the top is played. However, she didn’t choose a certain metaphor or intend a specific story for audience. She is only interested in herself or ultra marine blue. This is the obvious difference between her blue and Yves Klein’s. Yves Klein made his work to look at the artistic spirit that exists serenely about of his blue creation by using IKB. On the contrary, Eunpil Cho dug all around the blue world and set up an endless journey of her blue obsession. In fact, human thoughts are not always logically linear. It is not easy to draw a logical causality from the numerous pieces that she used so far. She is shaping many kinds of emotions. This attitude is different from Klein’s, who focused on external things of art. She listens to the deep inside of herself.
    Beyond the blue...
    The reason why she is obsessed with ultra marine blue is clear but not easy to put into words. It is not something “real” based on material sources. She 작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을 사유한다.
    French philosopher Henri-Louis Bergson (1859~1941) dedicated his life to studying time and memory. He said there is no consciousness without memory, and no continuation of a state without the addition, to the present feeling, of the memory of past moments. It is this which constitutes duration. Inner duration is the continuous life of a memory which prolongs the past into the present, the present either containing within it in a distinct form of a ceaselessly growing image of the past. Without this survival of the past into the present there would be no duration, but only spontaneity. The present is nothing more than the past and what is found in the effect was already in the cause. Ultra marine blue became a part of her work, along with London Bridget, palace, animals, and other objects. Sometimes past events or people in memory are recalled by certain things, colors, smells or shapes. Memories come out either consciously or unconsciously. Memories are the area where the consciousness has little control, and they may not come up in a logical way. When those unrelated images are connected, a new narrative develops, the origin of which is unexplainable. That’s why her work cannot be fully explained. For that matter, many objects that she chose, as well as the color: ultra marine blue, find their source in her memory. There aren’t many artists who use a specific color for their work motive in Korean modern art. I am not sure when she will end her journey, but it is fortunate to have one special artist who has this unique relationship with ultra marine blue.

  • Madly Blue! -- Gahyun Kim

    "Blue is infinite emptiness controlled by divine accordance" - Max heindel

    Every person has his own unique language. The color Blue has long been the unique language of Eunpil Cho. Blue, perhaps an insignificant notion to many of us, is a completely new concept in her talented hands. Throughout her journey as an artist, blue has moved along with her, her constant companion.
    It is very rare for an artist to focus solely on color rather than shape to improve the depth of his work. It is rarer still to hold this focus for such a length of time. For a while, Insik Gwak, Woohwan Lee, and Seobo Park, the 1st generation of Korean monochrome artists, showed a similar approach, but they aimed at an extreme plane. To them, drawing was an emotional experiment about the black space of Korean’s traditional ink paintings. However, Eunpil Cho’s blue is more essential.
    As in her previous work, her works at the Art Space 現 reflect her journey to find absolute blue by uniting sculpture, painting and installation. She speaks with her own voice, allowing her works to express themselves through the color blue. It is not easy to use color as the main subject of her work. She has said that her life filled with complicated feelings, joys and sorrows, and coalesced in a memory tinted with blue.
    The more she worked with blue, the more she desired to discover its pure essence. When she studied in London, she tried various methods to satisfy her hunger for it, from sculpture, two dimensional art, drawing, to video work, but she felt that the more she tried, the more the focus on technique became a distraction. I think she wanted her pure blue to have the same color brightness and intensity as dry pigments. After she returned to Korea, she tried removing the influence of the techniques. She used crochet for modeling works, which made it possible to embrace 2-demension and 3-demension at the same time. Her recent work, “Blue beyond the Blue”, “The Swaying palace”, and “The Swaying Bridget” are the representative outcome. Knitting creates a 3-dimensional piece by putting threads, which have only one dimension, onto a two dimensional planar surface, and then giving that plane depth by their modeling.
    She has said that she wanted immerse herself in the process in order to find her true self. A sense of self that had been lost somehow in her ealier focus on techniques that hid her essence. The tangled threads become an allegory for her entangled memories, transcending space and time.
    Her works unite these complex shapes with the language of blue. It may be seen as an unnatural view. She is using the abstract power of blue to transcend the irony created by the conflict between her memory and actual events. As if a single thread representing an actual event might be modeled in such a fashion as to represent a more abstract reality once finished. It is not knitted in the very elaborate way and doesn’t have strong descriptive power, it is perhaps a more relaxed weaving of time. It is the twilight zone where past memories and new memories coexist. At the same time it is the depth of blue that shows regeneration and fantasy.
    Realists accept color because they consider color as a mirror that reflects reality. On the other hand, some color theorists say the power of color to communicate is not exclusively due to colors' use in communicating reflections of the natural world, but also colors have some inherent vocabulary of their own. If you look at her work, you may understand this power. It is rare for installation art to be so meditative, but I am led to believe her choice of this particular blue is increasing the meditative power of her work.
    Colors have had the power to create mystery throughout history. Colors have given emotional energy and imaginative power to people through their use in religions. It is important with this work to consider the many different meanings conveyed historically by blue. Sometimes blue is considered to be positive and ideal, as the ideal figure that is rare and unreachable, expressed as ‘oiseau blue’. Sometime blue is considered to be depressive, miserable, tragic and lonely. The artist shows both aspects of blue in this exhibition, introspection and self-reflection, and the lyrical world full of vitality.